뭘 포기할 수 있겠어요- 최민식 사진 작가의 기일에

in kr •  4 years ago  (edited)

2013년 2월 12일
감히 뭘 포기할 수 있겠어요. – 최민식의 기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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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천년이 흐른 뒤 남아 있는 사료는 비디오테이프나 DVD나 각종 디지털 자료들이 아니라 좀먹고 냄새나는 책더미 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불타 없어지지 않는 한 종이는 남을 것이고 그 위에 쓰여지고 인쇄된 것들은 남아 있겠지만 나머지들은 그럴 수 없게 될 거란 얘기였지요. 더 실감나게 얘기하자면 100년 전 인쇄된 책은 읽을 수 있지만 20년 전 우리가 보던 VHS 비디오테이프는 그저 처치곤란의 쓰레기가 돼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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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아날로그적입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도 인화된 이상, 즉 파일이 아니라 ‘출력’된 상태로 인화지에 담기면 전혀 다른 영역으로 변환되는 것이죠. 어느 한 순간 파일은 날아갈 수 있지만 사진은 벽장 깊숙이 또는 어느 책갈피 속에서 잠들지언정 웬만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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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문외한인 제가 처음으로 이름을 머리에 담았던 이름은 최민식입니다. 어렸을 때 가난 때문에 헤어진 이산가족을 다루는 프로그램 조연출을 할 때였죠. 작가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누군가의 사진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선배 PD도 동의했습니다. 제게 떨어진 일거리는 사진 작가 ‘최민식’의 연락처를 알아내 방송에서 사진을 쓰겠다는 허락을 받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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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만 해도 사람 연락처 알아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무슨 협회와 그의 사진집이 나온 출판사에도 연락을 취하고 사정을 얘기했지만 끝내 방송 당일까지 연락처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선배는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최민식의 사진들을 방송에 쓰기로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막 저작권 개념이 돋아날 때였으니 가능한 얘기였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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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다시 눈여겨보았던 최민식의 사진들은 실로 마음을 울렸습니다. 끝도 없고 출구도 없는 가난, 온 몸을 내리누르는 빈궁의 처절함 속에서 아스팔트의 민들레처럼 새어나오는 희망의 꼬투리를 그렇게 생생하게 잡아낸 장면들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사진들을 편집하면서 선배 PD는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지하 3층 쥐구멍에서도 볕을 찾어내는 느낌”이라구요. 그의 사진 속 모델들은 갈데없이 막막했지만 결코 비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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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라도 와서 장사가 잘됐던지 얼굴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웃는 누더기의 소년 소녀 우산 장수들, 터울 차이도 얼마 안나지 싶은 동생들을 업고도 싱싱한 표정을 버리지 않는 소녀들, 비끄러업은 아이에게 국수를 먹이며 행여 떨어질세라 면발 끝과 아이의 입을 주시하는 엄마, 나도 모르게 보는 눈 습기가 차고 가슴 속에서 뭐가 올라오는 듯 토해 내고 싶고 그 시대로 시간이동이라도 한 듯 사진 속 인물들의 체온이 만지는 손 끝에 느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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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은 가난한 이들을 주로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자신도 지독한 가난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체험이 없었다면 절대 그런 사진을 찍지 못했을 것”이며 “다큐멘터리 사진의 생명은 ‘발견’인데,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 사랑이 없다면 그런 모습들은 발견되지 않는다.”(2005년 톱클래스 2005년 9월호 인터뷰)고 얘기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가난’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청계천변에 즐비했던 판잣집들을 때려 부수고 그 일대 수만 명 사람들을 군용 트럭에 싣고 서울 외곽에 갖다 버리다시피 했던 정부의 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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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사진들을 찍어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가’ 이것이 정부의 불만이었습니다. 1968년 울릉도에서 체포된 간첩의 소지품 중에 그의 사진집이 나온 뒤로는 아예 요주의인물이 됐습니다. 걸핏하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혼찌검이 났고 사진관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해외에도 초대장이 와도 나라에서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고, 별안간 심야에 구둣발로 문을 박차고 쳐들어와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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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계 출판사로서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웠던 분도 출판사가 아니었으면 사진집 출판조차 이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출판사에서 제게 작가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은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갑니다.)
뭣하러 이런 지지리궁상을 찾아다니느냐 ‘오늘의 한국’ 같은 멋지고 예쁜 사람들에 기가 막힌 금수강산 풍경 찍어 주면 잘 보아 주겠다는 회유도 있었지만 최민식은 평생을 그의 사진집 제목처럼 ‘인간’, 그 중에서도 바닥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집중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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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프로그램 메인 작가의 책상에 최민식의 작품이 붙어 있는 걸 보았습니다. 위에 얘기했던 팔 하나 다리 하나 없는 신문팔이의 사진이었죠. 부산일보를 돌리고 있는 이 청년은 1985년 최민식의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중심을 잡을지 가늠도 되지 않지만 신문 다발을 움켜쥔 청년의 손가락은 야무지고 종아리의 알통은 돌덩이처럼 탄탄합니다. 금새 벌어질 듯한 입에서는 ‘신문이요’가 터져나오고 자갈치 시장 (최민식이 가장 애썼던) 바닥을 외다리병정처럼 통통 튀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요. 작가에게 그 사진을 붙인 이유라고 있느냐 하니 답이 이랬습니다. “저 사진 앞에서 뭘 포기할 수 있겠어요.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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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가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껴온 가난의 징벌에 대한 위로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가난은 살기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안한 외줄타기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외줄 위에서도 웃을 수 있고 줄에 매달려 토막잠도 자며 줄 너머의 꿈을 꿀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최민식 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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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 카메라는 가난한 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가난한 자의 행복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나의 사진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무한한 행복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 2003년 2월 12일 그는 수많은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인간’들을 우리 품에 안기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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