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1947. Post 28.

in wisdomandjustice •  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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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와 관련하여 미국무장관 마샬과 소련 외교장관 몰로토프의 교섭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미군의 동원해제라는 국내적 요구와 공산주의 팽차의 방지라는 상반되는 정책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소련은 한반도 북부의 완충지대 확보라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없이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에 합의하게 됩니다.

결국 이번 웨더스비 교수의 포스팅은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현실적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하는 과정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게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우리는 1947년 봄 미국이 봉쇄전략을 강화해나가면서, 동시에 군대를 지속적으로 동원해제 하는 것을 보았다. 군대를 줄이고자하는 정책은 워싱턴으로 하여금 한국의 점령을 종식시키는 방향으로 밀어 부쳤으며, 봉쇄를 강화하는 정책은 북한이 남한지역으로 소련이 팽창하지 않도록 하기를 요구했다. 미국이 4월 외무장관 회담에서 이문제를 논의할 준비를 할 때, 한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과 협조가 가능한지를 자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양국이 모스크바 회담에서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마샬 국무장관은 회담 시작할때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매우 정확하게 소련이 한국의 경제적 통일을 방해하는 데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지휘관은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소련 지휘관들이 거절했다고 언급했다. 마샬은 또 소련이 협상을 교착시키곤 했다고 통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이런 교착은 “민주적”이란 용어에 특정한 정의를 주장하면서 한국 지도자들의 대부분을 위원회에서 배제하려는 소련의 의도에 의해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이익을 위해, 양국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바탕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할 것을 제시했다.

마샬은 미국은 자신의 지역에서 1945년 모스크바 협상의 이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구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일 소련이 서울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에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은 일방적으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협박은 작동했다. 몰로토프는 그의 답변에서어떤 정당이 참가할 것인가에 대한 소련의 라인을 주장하면서도, 5월 20일 미소공동위의 재개에 동의했다. 소련 외무장관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업무는 “한국에 대한 모스크바 합의의 정확한 이행에 기초”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샬은 몰로토프가 “정확한 이행”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한국의 지도자 모두가 참가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이전에 표현된 정당의 견해를 이유로 협의의 자격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반복했다. 그러나 마샬은 회담의 재개를 원했기 때문에, 협상방안을 제시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점령국과 협조를 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과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양측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업무에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 반대하는 어떠한 정당이나 집단을 배제하는 정도에서 마샬의 새로운 조건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마샬은, 미국무부 정무실 랭돈(Langdon)이 만일 완전한 표현이 자유를 확보하지 않으면 남한의 우파정당은 위원회에 참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 몰로토프의 조건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련과 미국의 지휘관들이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을 재개했을 때, 한국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협상에 성공할 것이라는 어떠한 기대도 없이 회담한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한반도의 북부지역에 만들어 놓은 안보적 완충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며, 미국은 서울에 공산주의 정부의 수립에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정치적 무대의 한 구석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공연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관중은 누구였을까 ?

다음 포스트에서는 1947년 외무장관회담의 주요안건이 되었던 독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알아 보겠습니다. 독일에 두개의 국가를 수립하게 된 조치에 대한 열띤 논쟁은 소련과 미국이 왜 서울에서 희망없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였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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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mazing masterpiece,an article that tells about the histories of important figures of old times,@wisdomandjustice

번역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퍼즐처럼 하나하나 맞춰지는 것 같군요

저 때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갈라놓지만 않았더라도...
라는 생각을 매번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