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프랑스 작가주의 이론/까이에 뒤 시네마, 실천하는 이론 1

in cahiers •  6 years ago  (edited)

프랑스 작가주의와 관련된 번역문을 올립니다. 관심있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월간지《카이에 뒤 시네마》는 로 뒤꺄(Lo Duca)와 자끄 도미올-발크로즈(Jacques Domiol -Valcroze)에 의해 1951년 4월부터 출간됐으며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2호부터 참여했다. ‘작가 정책 (Politique des auteurs)’의 총탄을 넘어뜨린 프랑수아 트뤼포의 논쟁적인 글,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은 1954년 1월 31일자인 31호에 실렸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시행하는 감독들에게 부차적인 역할을 남겨주면서 주로 ‘양질’의 소설들을 각색한 작품의 작가에게 창작의 중심적 역할을 주는 –특히 오랑슈(Aurenche)와 보스트(Bost)의 경우처럼- “양질의 전통”에 대한 혹독한 공격은 프랑스에서는 현행적으로 지배적이었다. 반대로, 프랑수아 트뤼포는 창조적인 역할이 영화에 대한 서약이 다른 사람의 창작의 실행 이상인 어떤 것이던 작가로서 영화감독에게 주어지는 작가 영화(cinéma d’auteurs)를 주장했다.
그 예가 되던 프랑스 영화는 르누아르, 브레송, 콕또, 베케르, 강스, 오퓔스, 타티 그리고 리엔하르트(Leenhardt)와 같은 작가들의 영화들이었다. 도미올-발크로즈는 이 글을 전환점으로 보면서 ‘진정한 시발점’이 된다고 말하면서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작가 정책’이 단 하나의 독트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카이에는 역사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발명가들과 시인들의 집’으로서 잡지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초기의 영화 리뷰(Revue du Cinéma)로부터 많은 영감과 정보를 얻기도 하였으며 영국의《시퀀스(Sequence)》의 린제이 앤더슨(Lindsay Anderson)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앤더슨은 영화감독은 영화에서 표현적 원천을 조절하고 안내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진지한 아티스트라고 믿었다. 카이에의 장인과 작가의 구별이 기대한 것은 작가주의의 실행을 다른 곳에서 저항하는 결론으로 옮기는 것이었으며 진공 상태에서 작가주의를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말 뉴 웨이브(누벨바그) 영화의 감독이었던 비평가들의 역할은 카이에를 위해서 ‘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an)’과 같은 종류의 문화적 흐름을 성취했다. 50년대 중반에는 국제적으로 여러 형태들을 취하지만 변함없이 세대적 충돌, 오래된 가치와 그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바랬던 전후 세대의 살균한 관습성에 대한 저항을 포함하는 반대 문화의 부상을 보았다. 많은 글들은 반응적이 아니었다면 그것의 최소한의 실행 속에서 보수적이었다.(트뤼포의 ‘심리적 리얼리즘(psychological realism)’에 대한 거부는 논란을 일으켰던 졸라의 자연주의의 ‘검댕(smut)’을 환영했던 점잖음으로 공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십 분도 안 돼서 ‘타르(tart)’, ‘창녀(whore)’, ‘비치(bitch)’, 그리고 ‘헛소리(bullshit)’ 같은 단어들을 듣게 된다. 이것이 리얼리즘인가? - 프랑수아 트뤼포,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의식 있는 정치와 거의 관련이 없는 방식에도 불구하고 카이에의 논조는 매우 저항적이었다. 정책의 부재는 사회적으로 의식이 있는 비평, “열성적인”을 자극했다. 예술의 전통적인 영역의 침식을 구성했던 사실, 카이에 평론가들은 논쟁을 일으키는 상황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들은 부르주아와 이임된 것을 논란이 되게 하면서 그들 자신을 발견하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쪽을 가지고 있었다. 미장센의 대담함, 작가의 독특한 인격(personality)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를 대신해서 선호하는 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그들이 주체적 문제를 토대로 해서 영화에 가치를 정하는 것에 대한 거절이었다. 다시 순수하게 영화적인 것에 대한 탐색이었지만 그것은 작가주의를 단지 험담꾼들을 비웃던 것뿐만이 아니라 더 나이 많은 대표자, 글에서 주체적 문제의 질문들에 대한 유보들이 자꾸 나타나는 바쟁을 걱정하기도 했던 형식주의로 이끌었다. 1974년의 중요한 글에서 (“작가정책”,《점프 컷》, 1, 2호) 존 해스(John Hess)는 ‘정책’을 1호 10쪽에서와 같이 구별한다. 1961년 카이에의 오베이다(Fereydoun Hoveyda)는 “자기비판(Autocritique)”에서 형식주의에 대한 비난을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을 과대평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형식주의는] 의미로부터 형식을 분리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형식주의는 형식을 무시하는 주체-문제의 시네마와 만난다. 그들의 의도만 가지고 스탠리 크라머 혹은 오탕 라라를 판단하는 것은 충분할 수 없다, 어쨌거나 그들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원자적 자살 혹은 전쟁에 저항해서 저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관객을 이동시키거나 그들이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 또한 필수불가결하다.”

인격주의(personalism)는 그 자체가 뒤죽박죽에 대한 어떤 것이었다: 정신적인 발전의 중요성을 믿음으로써 반자본주의를 정렬하기 위한 거의 철학적인 시도, 사회주의와 초기 존재주의로부터 적절해진 개념들; 그리고 그것의 1950년대의 카이에의 지적인 배경을 특징짓는 뒤죽박죽, 종교적인 교훈주의의 가변적 혼란, 존재론적 불안, 부조리한 니힐리즘.
‘앵그리 영 맨’의 쟁점과 관습에 대한 비트족의 거절. 이러한 것들과 함께 미국식 문화에 대한 매혹이 위치되어야 했다. 미국 문화는 점령의 문화적 박탈로 인해 강화된 매혹인 프랑스 지식인적 삶에 전통적으로 exerted되어 왔다. 미국 문화와 연합된 거침과 성급함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양질이었고 까이에는 자발성, 독창성, 거침, 원시적임, 폭력과 에너지와 같은 인정의 개념들로써 지지를 받았던 듯하다. 그것은 단일한 철학적 원천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초기 카이에 속에서 위치들의 혼란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자극의 다양성이다.
이와 동시에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프로파일, 고독, 목적 없음, 내성, 공격과 실패,《포지티프(Positif)》의 정치적 근심에 여지를 남겨두기와 같은 주제에 촛점을 둔 영화들의 어떤 선호가 혼란 속에서 구별된다.

프랑수아 트뤼포,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발췌문
《카이에 뒤 시네마》, 31호, 1954년 1월
(이 글 전문은 니콜(Nichols)에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왜 그들은 나에게 ‘왜 우리는 이러한 전통 그리고 이러한 질적 수준 내에서 그들의 작품에 최선을 다한 모든 영화감독들에게 같은 숭배를 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왜 이브 알레그레는 베케르처럼 장 델라노이는 브레송처럼, 끌로드 오탕 라라는 르누아르처럼 숭배하지 않는가? (선호는 수 천 가지의 비선호로 만들어 진다’― 폴 발레리.)
그렇다면, 나는 ‘양질의 전통’과 ‘작가영화’의 평화로운 공존을 믿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브 알레그레와 델라노이는 단지 클루조와 브레송의 캐리커처일 뿐이다.
이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그토록 칭송하던 영화를 가치가 떨어지도록 이끄는 논란을 일으키려는 욕망이 아니다. 나는 심리적 리얼리즘의 과장된 긴 삶이 <황금 마차(Le Carosse d’or)>(르누아르 Renoir), <황금 투구(Casque d’or)>(베케르 Becker), 그리고 <블로뉴 숲의 여인들(Les Dames du bois de Boulogne)>(브레송 Bresson)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컨셉 내에서 새로운 작품과 대면할 때 대중적 몰이해의 원인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는 상태다.

Cahiers du Cinéma, “The Theory in Practice”, Theories of Authorship, 1981, pp.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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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jambon 님, 반갑습니다. 영화 평론 번역문 잘 읽었습니다. 저도 파리에서 프랑스 요리와 여행을 주제로 활동하고 있는 스티미언 입니다. 적지만 풀보팅과 팔로우 하고 갈께요. 스팀잇에서 자주 소통해요 .

네!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