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3(일)역사단편200. 춘추시대의 역사은폐

in hive-143843 •  19 days ago  (edited)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단재400.jpg

공자는 소위 '예'라는 것이 살아있었다(?)던 시대를
꿈꾸고,
역사서인 <춘추>를 쓰면서 온갖 수법으로
추악한 진실을 감췄다.
그의 조상이 당했던 치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기록했을까?

오늘은 춘추시대의 사건하나를 살펴본다.
먼저 진실을 살펴본다.
내용은 이러하다.

노(魯)나라 桓公元年(환공원년)이던 B.C. 711 년에
宋(송)나라 華父督(화보독)이 孔父(공보)의 아내를 길에서 보고는,
눈으로 맞이해 눈으로 보내면서
“아름답고도 곱구나.”라고 감탄하였다.
<얼굴이 아름다운 것을 염豔이라 한다.>

'父'는 보통 '부'라고 읽지만
나이많은 사람이나, 벼슬하는 사람을 일컬을때는
'보'라고 읽는다.

감탄하고 끝났으면 그만이었을텐데

환공2년 봄(B.C. 710)에
송숙宋督이 공씨孔氏를 공격하여
孔父(공보)를 죽이고 그 아내를 취하였다.
‘화보독’은 宋戴公(송대공)의 손자이고,
孔父(공보) 嘉가는 ‘공자(孔子)’의 6世祖이다.
'嘉가'는 孔父공보의 字)

화보독은 대부였고,
공보가는 '司馬사마'였다고 한다.
사마는 '병권'을 맡은 관리였다.

남에 아내가 탐나서 고위 관리를 죽이고 빼앗은 것이다.
다음에 어떤일이 일어났을까?

송상공宋殤公이 크게 노하니
화보독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송상공을 시해弑害하였다.

송 대공(宋戴公: BC799 ~ BC 766년), 제11대 군주
송 상공(宋殤公): 송(宋)의 제15대 군주(BC 719년 ~ BC 711년)
殤(상): 일찍죽다, 횡사하다

마침내 군주를 죽이게 되었다.
군주를 죽이면 댓가를 지불해야하던 시대였다.

노환공魯桓公이 제후들과 稷(직)에서 회합하여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제거하여
송나라의 난리를 평정시키기를 상의하였다.

제후들이 연합하여 토벌을 하기로 했으니
이제 화보독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황당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으니

뇌물 때문에 도리어 그를 도와 '화씨華氏'정권을 세워 주었다.

어떤 뇌물을 썼기에
당대의 공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반대결과를 가져왔을까?

'郜大鼎(고대정)'을 노나라 환공에게 뇌물로 줬단다.
'鼎(정)'은고대사에 큰 의미를 갖는 세발달린 솥으로
'郜大鼎(고대정)'은 郜(고)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노환공은 토벌의 주체였고 연합했던 제후가 있으니
齊‧陳‧鄭(제,진, 정)나라였다.
그들에게도 모두 그럴듯한 뇌물을 줬단다.

공자가 태어나기 수백년전의 세상도 이미 이러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元年, 宋華父督見 孔父之妻于路,目逆而送之, 曰,美而豔。
二年,春,王正月,戊申,宋督弒其君與夷,及其大夫孔父。
三月,公會齊侯,陳侯,鄭伯,于稷,以成宋亂。
夏,四月,取郜大鼎于宋,戊申,納于大廟。

(옮기면)
원년, 송나라 화보숙이 공보의 아내를 길에서 보고는
눈으로 맞이해 눈으로 보내면서
“아름답고도 곱구나.”라고 감탄하였다.
2년 봄 주周왕 정월 무신일에 송숙(화보숙)이
그 임금 與夷(여이:상공의 이름)와 大夫孔父(대부공보)를 죽였다.
3월에 환공이 제후‧진후‧정백과 稷(직)에서 회합하여
송나라의 반란을 평정시키고자 하였다.
여름 4월에 송나라에서 郜大鼎(고대정)을 취해 와서
무신일에 太廟(태묘)에 들여놓았다.

여기에도, 춘추필법이 등장한다.

공보의 아내에 대한 내용이 없다.
수치스러운 일을 기록하지 않는다!

공자의 춘추에 적힌 살해사건관련 구절인

宋督弒其君與夷(송숙시기군여이),及其大夫孔父(급기대부공보)。

에 대한 주석을 보면

"字(자)인 '嘉(가)' 를 쓰지않고 '孔父(공보)'라고 이름을 칭한 것은,
안으로는 그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밖으로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서,
자신도 죽고 禍(화)가 그 임금에게까지 미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있다.

공자의 춘추에는 이처럼
자신들의 수치스러운점은 감추고,
자랑할것은 과장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내막을 모르면 읽어본들 아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 춘추필법이
시대를 거쳐가면서 수법이더 악화되어
그나마 공자시절같은 '예'니 '도의'니 하는것은 사라지고
역사를 기록할때
오로지 '자국의 수치는은폐'하고,
다른나라의 성공은 '축소, 은폐'하고
자기들이 한일은 '확대, 과장'하는 수법으로 가득채웠던 것이다.

우리가 중국의 역사책이나, 김부식이래 조선의 역사책을 읽을때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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