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6(수)역사단편79-평양패수고(11) 낙랑과 평양3

in hive-143843 •  3 months ago 

신채호 선생의 저술을 읽으면서
절감하는 바가 있다.
젊은시절 헤겔과 마르크스를 통해 느꼈던 통쾌함과
이어서 찾아온 현실의 벽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해석하는 자에겐
언제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하고 뛰어난 사상가라 하더라도
결국 시대의(=조건의)한계에 부딪힌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가 아닌
더 나은 해석과 실천을 위한 양식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지만
사상가에게 애착을 가진 사람은 아쉬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단어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본문은 <독립기념관 제공>

後人의 僞證(위증)과 改竄(개찬)이 많은 中國 各史에도,
또한 無意中(무의중)에서 끼쳐온
樂浪이 遼東에 있는 證據(증거)가 間或 (간혹)있으니,
<출처: 평양패수고>

改竄(개찬): 고치는 것
끼치다: 어떠한 일을 후세에 남기다

(해석하면)
후대의 위증과 고친것이 많은 중국의 각 역사책에도,
또한 의도치않게 남겨진
낙랑이 ‘요동’에 있는 증거가 간혹있으니,

『後漢書후한서』 帝紀(제기) 安帝 永初 五年 三月에
「夫餘犯樂浪塞(부여범낙랑새」를 記한 바,
扶餘는 北扶餘 - 今哈爾賓(하얼빈)이니,
樂浪(낙랑)이 遼東(요동)의 樂浪인 故로
扶餘(부여)가 그 塞(새)를 攻(공)함이오.
<출처: 평양패수고>

(해석하면)
후한서 제기(帝紀) 안제 영초 5년 3월에
“부여가 낙랑의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기록한바,
여기의 부여는 ‘북부여-현재의 하얼빈’이니,
낙랑이 요동에 있는 낙랑인고로
부여가 그 변경을 침범한 것이다.

지도와 함께 다음 부분을 읽어본다.
image.png

『資治通鑑자치통감』
愍帝 建興 元年 美川 十四年(민제 건흥원년 미천14년)에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요동장통거낙랑대방2군..)
樂浪王遵說統(낙랑왕준설통)
率其民千餘家歸慕容廆(솔기민천여가귀모용외)
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외위지치낙랑군이통위태수」
를 記한 바, <출처: 평양패수고>

愍帝(민제): '서진' 마지막 왕 사마업(300~318)
건흥(建興): 313~317
건흥을 연호로 사용한 왕은 여러명인데
미천왕14년은 서진의 사마업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帥(수): 인도하다, 우두머리

(해석하면)
<자치통감> 민제 건흥원년(313), 미천왕 14년에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두 군을 근거로 삼아.…
낙랑인 왕준이 장통에게 그 백성 1천여명을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도록 설득하였다.
모용외는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
라고 기록한바,

註20)
「資治通鑑자치통감」에는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요동장통거낙랑대방2군)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여고구려왕을불리상공)
連年不解(연년불해)
樂浪王遵說統 (낙랑왕준설통)
帥其民千餘家歸廆(수기민천여가귀외)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외위지치낙랑군이통위태수)
遵參軍事(준참군사)”으로 되어 있다.
(주석은 국사편찬위에서 달은 것이다.)

註20)「자치통감」에는
요동의 장통은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차지하고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공격했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낙랑사람 왕준이 장통을 설득해서
백성천여가구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의탁했다.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한후 장통을 태수로 임명하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되어있다.

계속 읽어본다.

만일 統(장통)이 據(거)한 樂浪·帶方이
薩水 以南(살수 이남)의 樂浪·帶方이라 하면
當時(당시)에 高句麗가 强盛(강성)하여
薩水 以北만 掩有(엄유)하였을 뿐 아니라,
곧 遼東의 西安平·安東縣(서안평-안동현) 等地까지도
美川 十二年에 벌써 高句麗에 入하여
薩水 以南(살수이남)을 據(거)한 張統(장통)이
千餘家(천여가)를 率(솔)하고 遼西까지 逃走(도주)하지 못하니,
이것도 遼東(요동)의 樂浪됨이 또한 無疑(무의)하다.
<출처: 평양패수고>

掩有(엄유): 남기지 않고 모두 가짐

(해석하면)
만일 ‘장통’이 차지했다는 낙랑·대방이
‘살수 이남’의 낙랑·대방이라 하면
당시에 고구려가 강성하여
살수 이북만 차지한것이 아니라,
곧 요동의 서안평-안동현 등지까지도
미천왕 12년에 벌써 고구려에 소속되어 있었으니
살수이남을 근거로한 張統(장통)이
千餘家(천여가)를 이끌고 요서까지 도주하지 못하니,
이것도 요동에 있던 낙랑임이 또한 의심할여지 없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면,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를 피해서 어떻게
지나땅으로 도망을 칠 수 있느냐하는 지적이다.

가능성은 아래와 같다.

  1. 당대의 고구려가 형편없이 작은 나라였거나
  2. 누군가의 기록이 위조되었거나
  3. 낙랑의 위치가 평양이 아닌 요동이었거나
  4. 지리적 무대가 애당초 다른 지역이었다.

여기서 고대사해석의 관점이 갈라진다.

반도사관(식민사관,주류사학) VS 대륙사관 VS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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