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6(목)역사단편163. 독사신론讀史新論(44)

in hive-143843 •  5 days ago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
< 출처: 단재 신채호, 讀史新論[독사신론]>

<단어출처: 다음, 네이버사전>

오늘 부터는 '지나족 VS 우리민족'의 대결을
5개 시기로 분류해 소개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衛滿(위만)·劉徹(유철)의 交惡(교오)한 後 百餘年(후 백여년)에
我 扶餘族(아 부여족)의 聲勢(성세)가 漸大(점대)하여
東明聖王(동명성왕)이 四郡(4군)을 征服(정복)하고
大武神王(대무신왕)이 漢·高句麗縣(한고루려현)을 擊取(격취)하매
漢光武 劉秀(한광무유수)가 來爭(래쟁)하다가 畢竟 敗退(필경패퇴)하여
薩水 以南(살수이남)을 我(아)에게 讓渡(양도)하였으니
此(차)가 第(壹)期(제1기)오.
<출처: 讀史新論(독사신론)>

劉徹(유철):한무제, BC156년~BC87년, 전쟁을 좋아했기 때문에
무제’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위만조선과의 전쟁을 통해 ‘사군’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그 위치와 성격자체가 불확실하다.

交惡(교오): 서로 미워함
聲勢(성세):명성과 위세
來爭(래쟁): 와서 싸움
畢竟 敗退(필경패퇴): 결국 패배하여 퇴각하다
薩水(살수): 일제시대 관변학자 출신의 한국역사학계에서는 ‘청천강’이라고
비정했으나, 풀어야할 숙제다.
고구려가 멸망했을때 ‘평양성’ 위치가 어디였는지가 불확실 하기 때문이다.

(옮기면)
위만과 유철이 서로의 증오(전쟁)를 주고받은 뒤 백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 부여족의 성세가 점차 커져서
동명성왕이 '사군'를 정복하고,
대무신왕이 한의 고구려현을 쳐서 빼앗으매
한나라 광무제 유수가 쳐들어와 싸우다가
끝내 패배를 당하여서 '살수'이남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제1기다.

自後(자후)로 彼我 兩族(피아양족)이 數百年(수백년)을 相爭(상쟁)하되
如何(여하)한 大勝敗(대승패)가 無(무)하더니
曹魏末(조위말)에 至(지)하여는,
彼(피)가 其將 毌丘儉(기장 관구검)을 遣(견)하여,
我 丸都城(아 환도성)을 襲破(습파)하더니 旣而(기이)오,
紐由(유유)·密友(밀우)가 其 忠義(기 충의)를 奮(분)하여
舊都(구도)를 恢復(회복)하고 我武(아무)를 揚(양)하였으니,
此(차)가 第(二)期[제2기]오.
<출처: 讀史新論(독사신론)>

曹魏(조위): 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를 말한다.(220~265).
사마중달의 후손이 세운 ‘서진(265~317)’나라에 흡수되었다.
襲破(습파): 습격하여 깨뜨림
旣而(기이); 얼마후에, 곧
恢復 (回復:회복): 원래상태를 되찾음, 원래대로 됨
奮(분):떨치다, 휘두르다
揚(양): 드러내다

(옮기면)

이후로 우리 민족과 지나족이 수백년을 싸워 왔으나
어떤 큰 승패가 없었다.
'조위'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장군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우리 '환도성(丸都城)'을 습격하여 격파하더니,
얼마후에 '유유와 밀우' 가 충성스런 의지를 발휘하여
옛 도읍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의 용맹스러움을 드러냈다.
이것이 제2기다. <출처:독사신론>

오늘날 고구려를 생각하면 승리의 명예만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지나족과의 사투로 얼룩진 고난극복의 역사였음을
알게되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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