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자신의 역사서술에 대해
述而不作(술이부작)
나는 전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실증주의역사학에서는
역사학은 어떤 사건이 원래 어떤것이었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입견, 편견, 이해관계를 벗어나'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식민사학자들이 내세우는 '사료비판'을 통한
합리적인 역사해석역시
기록과 유물의 비교
라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전부 맞는 소리고 올바른 접근법이다.
말로하는 올바른 접근법과
현실적 어려움은 무엇인가?
지구상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겠지만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는 극복하기 어려운
크나큰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번째, 불순한 의도다.
중국의 터무니없는 자기 중심적 역사조작과
일본의 '정한론'으로 드러나는 역사조작과
힘있는 주변국의 기분에 맞춰 알아서 조작한 한국역사
두번째, 우리의 역사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대에는 멸망시킨 왕조의 역사서를 불태워버렸고
고려조엔 김부식이후 사대주의 사관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조선조엔 민간의 역사서를 회수해서 궁내에 숨겨놓고 있다가
전쟁통에 소실되었다. 개인들이 역사서를 쓰거나 보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조선말에 일본이 궁궐에 남아있던 많은 사료들을 일본으로
반출해서 보관중이다.
세번째,
어쩌면 이것이 실무에서는 가장 큰 난제중의 하나이다.
역사가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해석하면 되는거 아닌가?
요즘 번역프로그램이 얼마나 훌륭한데?
맞는 말이다. 한자로 기록된 문서를 번역기로 돌려서 읽을 수 있고
이미 번역되어 나온 서적들도 제법 있다.
그런 문제가 뭔가?
아래 글자를 보자
海盖爾: 헤겔
卡爾‧馬克思: 칼.마르크스
地理志에
'三陟郡本悉直國': 삼척군은 본래 '실직국'이다.
처음엔 단순히 이름이 나왔다.
이건 조작이나 왜곡이 필요 없는 대상이므로
사전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세번째 문장은 상황이 좀 다르다.
실직국이 어떻게 '삼척'으로 되었을까?
(물론 여기서의 삼척의 위치에 대해서는 또 확인이 필요하다)
'悉直'
단재선생이 명쾌하게 해석해 주셨다.
「세치」의 音이 '悉直'이 되며
'세치'에서 '세'는 뜻을 가져와서 쓰고
「치」는 音을 이용해서
'三陟' 이 된다.
한글로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다.
사전에서 확인하자.
발음기호를 연결해서 읽으면 '시치''세치'가 된다.
그리고 선생의 해석방법을 따라서
글자들을 재 조합하면
우리식 한자로 읽으면 '삼척'이고
중국어로 읽으면 '싼치'가 된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뭘까?
우리말과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고
- 처음엔 뜻을 가진 우리말을 한자로 적었는데
- 신라 경덕왕때 부터'지명,인명'등을 중국식으로 변경했고
- 궁예왕 부터는 관명까지 중국식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과거의 호칭을 지우거나
위의 사례처럼 절반(의미, 소리)씩 사용해서 기록하거나
아예 편한대로 아무렇게나 적어버렸다는 점이다.
삼척이라는 지명 하나를 이해하려면
이렇게
언어학적 재능(한문에 통달해야 한다)
시대적 유리함( 고대의 언어에 더 친근했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
객관적인 사료비판 방법사용
이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신채호 선생의 역사해석법에 대해
식민사학계에서는 '터무니없는' 방식이라고 치부하면서
아예 참고서적으로도 사용하지 않는것이다.
반박을 하려면,
같은 수준에서 지명, 인명, 기록을 해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되지 않으니
'소개서' 정도를 읽고 구석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경덕왕과 궁예왕의 부주의한 어쩌면 의도적인 '고명칭' 변경때문에
지명과 인명, 관직등을 해석하는 것이
고대유물 해석하는 것보다 몇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삼척을 소개하는 글에도
이런 내용은 적혀있지 않다.
왜냐고?
모든 공적인 자료들은 '주류사학계'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해석하지 않는다.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생계-명예목적'으로 역사공부를 하는 학자들이
할 수 있겠는가?
교직이나 직책이나 출판 등 모든 관련 영역에서 배제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신채호 선생조차 조선역사연구를 위한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역사방법론으로서의 '조선사 연구초'라는 저작을 통해
'이두문 해석'을 통한 역사서 읽는방법을 소개하면서
후대의 과제로 제시하셨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선생이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원사료의 부족과 자료수정의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
게다가 선생에겐 시간이 없었다.
<1880~1936년 2월 21일(향년 55세) 뤼순감옥에서 순국>
선생이 해외에서 고난속에 역사연구조차 어려움을 겪다가 순국했지만
우리의 역사학계는 식민시대를 통해 배양되고 뿌리를 내렸다.
<1896~1989>
문교부장관, 학술원 원장등 내노라하는 모든 직위를 차지하고
사학계의 방향을 결정지은 사람이다.
신채호 선생과 비슷한 시기이니 한문실력이 뛰어날거 같지만
이사람은 '한학'이 아닌 '신교육'을 받다가
십대후반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는 식민사관을 토대로한
'일본어서적'으로 공부했다.
지도교수: 일본 실증사학의 대부 '쓰다 소키치'
지도: 이케우치 히로시
두 학자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조선사》 편찬에 참가하여 수사관보로 재직했다.
표면적으로 뭐라 말하건
주류사학계의 주장에 인용되는
"100년전에 검증이 끝났다"
이 사람과 동료들의 식민시대 '사료해석'을 지칭하는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상황이지만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정지원이 집중되는 주류사학계의 인물들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연구하면 좋으련만..
아니 그것이 한국인으로서의 당연한 소명일텐데
어렵다.
학계라는 것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논문이 통과하려면 교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다른 입장을 취하려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논문이 통과 되더라도
강사자리 하나라도 딸려면 교수에게 아부해야 한다.
그것이 십수년 걸린다.
그리고 나면 그거로 끝이다.
틀린것을 눈치 채더라도 인정할 수 없다.
역사상 자기 주장을 번복한 학자가 있던가?
누군가 강제로 수정을 시키거나,
식민사관을 가진 자들을 적어도 국가지원에서는 배제 시키던가,
다른 의견을 가진 학자들을 적극 지원하던가
사회 구성원들이 정신을 차리던가
뭔가, 해결방향이 나와야 할텐데
적어도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누가 물리력으로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역사계는 식민지시대 역사계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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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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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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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게 읽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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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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