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관점에서 과학과 철학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과학 작업이 ‘수학’을 언어로 삼아 기술되기 때문에 자연어 사용이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철학 또는 더 넓게 인문학은 잘 다듬어진 언어와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철학은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 하지만 아무리 잘 다듬어졌다 할지라도, 생각의 도구인 자연어는 개별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의미를 넘어서기 어렵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움으로써 생각의 폭을 넓힌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전을 통해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개별 언어는 서로 일대일 대응하지 않으며, 심지어 많은 설명과 노력을 해야만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내용도 많다(가령 영어 science는 독일어 Wissenschaft와 의미망이 다를 뿐 아니라 프랑스어 science와도 꽤나 다르다).
이 점은 철학 문헌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여러 시사점을 준다. 어떤 철학 문헌이 시간의 검증을 거쳐 중요하다고 인정되었다면, 그 문헌은 최대한 그 문헌을 쓴 해당 언어를 통해 접근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고대 희랍어로 글을 쓰고, 데카르트가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썼으며, 흄이 영어로, 칸트가 독일어로 썼다면, 각 철학자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철학자가 쓴 언어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번역을 통한 접근은 어떠한가? 번역서는 번역자가 이해한 만큼만 전달할 뿐이며, 따라서 번역자의 오해를 전적으로 감수해야 한다. 이 점에서 중요한 철학자에 대해 원전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낡은 관행으로 치부될 수 없다. 당신이 읽은 것이 정말 그 사람의 생각이냐고 묻는 것은 학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래서 시원찮게 번역된 책을 읽으면 늘 개운치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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