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처음시작/황토귀틀집 손수 짓기

in hive-196917 •  3 years ago  (edited)

처음시작

2001년 우리 가족은 그 당시 모두가 꿈꾸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 두려운 귀농이라는 큰 포부와 나름 자부심을 갖고 서울에서 강원도 평창으로 터전을 옮겼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면서 일주일에 두어 번 귀농생태학교를 찾아 다녔고, 도시에서 이대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무언가 나만의 터전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그런지 1여년이 지나고 우리는 이 곳 평창에 땅을 마련했다.

2월, 아직 채 눈도 녹지 않은 비탈 밭에 올라서니, 전망도 너무 좋았고, 오래 전부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이지 않는 자연 옹달샘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둘 다 큰 고민 없이 첫 눈에 보고, 땅을 덥석 잡았는데 사고 보니, 전기를 끄는데 상당한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전기만 빼면 그 이후로도 그 땅을 산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다. 방림재에서 15여 년 살면서 많은 곳을 둘러봐도 그 땅만큼 전망 좋은 곳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만해서 그걸 선택했지만, 선택에는 그 대가를 또 반드시 치러야만 한다는 것을 살면서 톡톡히 겪게 되었다.
우리는 읍내에 임시 거처를 구해서, 집 짓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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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2001년 가을>

사랑채로 15평 남짓 황토귀틀집을 시작으로 해서, 이듬해 35평의 본채를 짓기까지 2여년의 시간을 보냈다. 실제 일한 날은 그리 되지 않지만, 입주까지의 시간은 상당히 오래 걸렸다. 물론 처음 사랑채를 지을 때는 통나무학교를 나오신 분을 주축으로 해서 남편과 동갑이면서 귀농하고자 하는 분과 소박하게 시작된 것이 그 해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 봄에 지붕을 다시 재 작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원 동원에 모두 공감하게 되었다. 본채를 지을 때 동원된 분들은 원래 신소재 주택을 지으시는 분들인데 황토집 짓는 것을 함께 해 보고 싶다고 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인원도 늘고, 집 짓는 것에 의욕도 넘쳤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을 때 우리는 상량식을 하고 나서, 잦은 비로 공사를 거의 한 달 이상 못한 적도 있어 마음만 조급해 했던 적이 있었다. 공사는 9월부터 속도가 나서 우여곡절 끝에 10월 29일이 되어서 겨우 입주를 하게 되었다. 그 해 가을은 10월부터 바람도 많이 불고, 아직 도배도 덜한 집에 바람으로 인한 스산한 기운마저 더해 주었다.

도배라고는 하지만, 사실 황토염색을 한 광목이었다. 그 많은 광목을 집 주변 황토에 염색을 한 후 평창강에 가서 씻어왔다. 마당 여기저기에서 말린 뒤, 밀가루 풀에 적셔서 흙벽이 떨어지지 않게 바르는 것인데 입주가 급해서 짐을 놓는 자리에만 바르고 나머지 부분은 입주 후에 거의 나 혼자서 작업을 했다. 그 때 곧 겨울의 적을 등 뒤에 두고, 11월 한 달 동안 거의 1시간만 자고, 계속 작업을 했다. 인간이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이후 믿게 되었다.

남편은 입주 후 바깥 봉단 쌓는 작업을 하고, 나는 식사가 끝나면 매일같이 광목을 찢어 풀칠하고 발라서 손이 다 틀었고, 하루에 1시간을 자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끈 후, 신기하게도 도배가 끝나고 12월부터 그 해 겨울 3개월동안 우리 가족은 밥 먹고, 시간만 나면 잠만 잤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 많게는 18시간 잔 적도 있다. 오랜 고단함을 잠으로 다 회복시켜서 병이 안 났을 거라고 두고두고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입주하여, 지은 우리 집 이름은 ‘방림재(芳林齋)’라 부르게 되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숲 속 집’이란 뜻이다. 원래 예전에 우리 마을에 큰 다리가 없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 옆을 지나 뒷 산 넘어 방림(芳林)으로 가서 장을 보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이 있는 이 곳 산비탈의 지게 길을 따라서, 방림으로 넘어가는 재라고 오래 전부터 불리던 이름을 우리가 그대로 사용하면서 재를 집 재(齋)로 바꾼 것뿐이다. 우리가 굳이 우리 집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마을 어르신들은 우리 집을 방림재라고 부르곤 했고, 우리 집을 찾는 손님에게도 자연스레 길 안내를 잘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림재... 언제나 그리운 그 곳, 아이들 추억이 함께 하는 곳, 그곳에 묻힌 졸리(래브라도 레트리버), 그리고, 방림재를 지을 때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 특히 도배와 구들장 놓을 때 도와주신 마을 어르신, 고생한다고 콩국수를 해서 갖고 오신 아주머니...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분들도 계신다.
그 모든 기억을 더듬어 방림재 추억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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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봄, 우리의 처음 시작은 이렇게 미흡했었다. 남편 친구들이 와서 함께 차광막을 쳐 주던 때이다. 친구들 표정이 각양각색이었지만, 모두가 한 표정으로, 장차 방림재 안주인이 될 나를 걱정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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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지인들과 사랑채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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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살림채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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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많은 분들이 땀을 흘리며 함께 했던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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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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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쓴 상량문 2002년 양력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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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림재는 모든 면적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집이 눈에 보기에 특별히 별나 보이지는 않아도 실내에 들어서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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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십니다. 하고싶다. 하고싶다. 만 외치는 일 중에서 하나를 하셨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