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 없는 커피를 만났을 때

in hive-196917 •  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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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집, 취향인 커피 원두





과거엔 취향이라고 말할 게 없어 색깔이 없는 자신이 부끄러운 청년이었다. 그저 관심사가 없는 분야에서 정보가 없었을 뿐이지, 누구보다 호불호가 강한 인간임을 깨닫고 기뻤다. 매년 새롭게 발견되는 취향이 있다. 지니고 있던 취향의 모습과 강도 역시 조금씩 진해지고 뾰족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커피이다. 이젠 당당하게 커피를 좋아한다 말한다. 구체적으로 나만의 취향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소하고 진한 라테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핸드드립이다. 산미가 강하고 꽃이나 과일향이 나는 싱글 오리진 원두가 취향이다.

한국에선 유독 산미 있는 커피를 불호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원두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커피집에서는 고소한 블렌드 원두만을 취급한다. 여름에 가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걸 제외하면, 스페셜티 커피가 아니거나 산미가 있는 원두를 고를 수 있는 카페가 아닌 이상 라테를 주문한다.

자연스럽게 여행을 가게 되면, 그 지역에서 취향에 맞을 법한 카페를 물색한다. 맛있어 보이는 커피집을 매의 눈으로 검색해서 고른다. 핸드드립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첫 순간, 성공하면 짜릿함이 두 배이다. "행복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다른 건 몰라도 커피에 관해서는 딱 한 모금만 마시면, 이게 나의 취향인지, 나의 취향이 아닌지, 나의 취향은 아닌데 좋은지, 나의 취향도 아니고 역시 별로인지 판단이 명확하다.




어제는 바다가 보고 싶어 강릉에 다녀왔다. 강릉이 어떤 곳인가? 테라로사가 탄생한 지역이며,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커피 장인이 산재하는, 웬만한 커피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커피 명가 아닌가?

강릉에서 이미 여러 번 맛있는 커피를 마셨지만, 갈 때마다 도장 깨기 하듯이 취향에 맞는 원두를 찾아 새로운 카페 고르기 놀이를 한다. 선택권은 주로 내게 있다.

보통 지도앱을 켜서 카페나 로스터리를 검색한 다음, '감'이 오는 카페를 찾을 때까지 주우우욱 스크롤을 내리며 리뷰와 설명을 읽으며 끌리는 곳을 찾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번엔 처음으로 '스레드' 검색을 이용해서 집단 지성과 현지에 사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빌리기로 해보았다.

딱 눈에 들어오는 집이 있었다. 관광지와 다소 떨어진 시내에 위치한 동네 커피집인데 모든 원두를 정성스럽게 직접 볶는단다. 누군가의 추천이 아니라 카페 사장님이 적은 글이었다. 리뷰를 검색해 봤는데 평이 나쁘지 않았다. 장인 정신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번엔 여기다.




그날 여행은 모든 게 수월했다. 길은 뻥 뚫려있었다. 출발할 때, 흐렸던 하늘은 막상 바다에 도착하니 그림을 그린 듯이 맑아졌다. 바다 아래 몽글몽글 구름이 깔리자 구름에서 튀어나온 파란 바다가 눈에 펼쳐졌다. 파도는 어느 때보다 거세고 커다랗고 시원했으며 생각보다 그리 춥지도 않았다. 바다에 나오니 온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에너지 소진 상태였는데 순식간에 자연의 원시력이 가득 찬 에너지가 몸으로 흡수되었다. 바다엔 아무도 없고 고요했다.

처음 가 본 해물 뚝배기 집은 너무 맛있어서 오랜만에 과식하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행복하고, 또 먹고 싶었다. 이제 집에 가기 전에 맛있는 커피가 테이크아웃하면 완벽한 하루이다!




조용한 골목에 카페가 존재했는데 차를 세우자마자 담배 냄새가 확 느껴졌다. 이상해서 돌아보니 인파가 없는 길가에서 젊은 처자가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필 내가 내린 딱 그 자리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반대편 카페로 향했다. 그때 이미 우주가 보내는 신호를 읽었어야 했건만.

카페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로스팅기가 있지만,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데도 지독하게 조용했다. 애써 불안함을 떨쳐버리며 편견에 손사리를 치며 더 밝고 명랑하게 사장님께 물었다.

"사장님, 여기 산미 있는 원두가 어떤 걸까요?"
(물론 메뉴판에서 해당하는 원두는 에티오피아 원두 하나란 걸 알고 있었다.)


"아... 저희는 깔끔한 맛을 선호해서 산미 있는 원두가 없어요."

무척 당황스러워 남편과 서로의 얼굴을 마주쳤지만, 차마 친절하고 왠지 손님이라곤 오늘 우리 밖에 없었을 것 같은 상황에서 주문을 안 하기가 머쓱했다. 차라리 아메리카노를 주문할까 고민했지만, 남편이 그냥 에티오피아 원두 하나를 주문했다. 친절한 사장님은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린 후, 커다란 500ml 텀블벅 가득 커피를 채워주셨다.

남편이 먼저 한 입을 마셨다. 어떠냐고 묻자, 남편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커피를 내밀었다. 한 입 마시고 '으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산미가 없다고 했을 때 그냥 나왔어야 해.'

이대로, 취향에 안 맞는 커피를 가지고 집에 돌아갈까,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새로운 커피를 사러 갈까 잠시 고민했다. 곧바로 새로운 커피집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엔 원래 사용하던 방식대로, 내 직감대로. 새로운 커피집을 찾는 데는 2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 강릉에 이렇게 맛있는 커피집이 많은데 내 취향에 맞는 커피집이 없을 리가 없지.

귀엽고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고요한 바이브, 문 닫는 시간까지 머무는 손님, 전문가 포스가 뿜뿜 풍기는 사장님 내외가 정석대로 내려주는 '에티오피아 시다모'를 한 입 마셨다. '아 역시 강릉 오길 잘했어. 행복해.'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마침 동이 난 원두까지 구매하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첫 번째 커피집에서 사장님이 산미가 없다고 말씀해 주셨잖아. 그런데도 왜 주문했어?"
"산미는 없지만, 맛있을 수도 있잖아. 괜찮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랬구나. 그렇지만 역시 다음번엔 주문하지 말고 나가야겠어."

돌이켜보니 그 커피 집 이름 자체가 고소한 커피를 취급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부터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장님의 답도 들었다. 사장님은 잘못한 게 하나 없다. 그 카페의 커피가 내게 맞지 않았던 이유는 사장님의 성품이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오래된 원두를 취급하거나 사장님의 커피 기술이 별로인 것도 아니다. 다만, 취향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저 내게 적합하지 않을 뿐이다.

주문을 하지 않으면, 왠지 뻘쭘하고, 그 커피집에게 별점 테러를 눈앞에서 가하는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억지로 주문을 했다. 선택하지 않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내게 맞는 걸 찾는 건 잘못되었거나 편견에 빠져 아집을 부리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맞지 않는 취향을 억지로 받아들인 후, 기분 나빠하거나 돈 아까워하는 편이 더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다.

세상에 카페가 얼마나 많으며, 그마다 색이 얼마나 다른가. 손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산미만 있는 원두를 좋아하는 것처럼 산미 있는 커피는 입에도 되지 않는, 그 카페를 좋아할 손님 역시 세상에 존재한다. 그 주파수를 조율하고 맞추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가끔 실수로 주파수가 맞지 않는 취향을 만나면 차라리 조용히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떠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적합하지 않은 무언가를 거절하고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용기이고 권리이다.

역시 아메리카노나 핸드드립이라면 산미 있는 원두가 좋다! 개개인의 취향은 모두 맞으니까.


2025.01.12 by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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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글에서 두 가지가 인상 깊었습니다. (1) 선택하지 않는 건 나쁜게 아니다. (2) 한 번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서 결국 원하는 성과를 얻었다.

강릉까지 먼길 왕래하셨는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어 다행입니다! 맛난 커피와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시기 바라겠습니다~ ^^

요거트님 감사합니다 😊

저는 산미있는건 입에 맞지 않더라고요. 고소한 너트와 초콜릿맛이 나는걸 선호합니다^^

호돌님은 고소파 이시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