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봤습니다./마음이 넉넉하고 싶은 남자@cjsdns

in kr •  7 years ago 

오늘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봤습니다./cjsdns

늘 마음속에서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못 가본 곳을 오늘 오후에 들렸습니다.
그곳을 가보게 된 것은 길가에 땅을 판다는 현수막을 보고 얼마나 좋은 땅인가 보러 갔습니다.
내가 부업인지 전업인지 구분이 안 가는 업중에 하나가 부동산 사무실 운영입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땅이 있다니 왠지 가보고 싶더라구요.

정말 명당이구나 싶은 땅이 있기는 있더라구요.
조용하고 양지 바르고 뒤로 야트막한 야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제법 널은 들이 펼쳐져있고
보기드문 명당인거 같은데 땅주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길이 넓어진다기에 왜 길이
넓어지냐 이대로가 딱 좋은데 하니 월사 이정구님 모신 곳이 바로 선생님이 차 돌려
나온 곳 이예요 합니다.

더이상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이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차를 돌린 곳으로 가서
주차를 하고 두리번 거리며 찾아보니 사당이 보이고 사당을 지나니 한참 위로 묘지가 보입니다.

월사 이정구[ 월사 이정귀]님은 문장으로 이름 높던 가문에서 출생해 가문 내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였으며
유년 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합니다. 1577(선조 10)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585년(선조 18)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를 했습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設書: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는 정7품관)가 됐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 로 간행됐습니다.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에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습니다.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켰다. 이정귀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합니다.

1601년(선조 34)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귀국한 뒤에 대제학에 올랐고 1604년(선조 37)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 했습니다.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했으며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이정귀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치군택민(致君澤民: 임금을 도와서 백성을 윤택하게 한다)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 글로써 나라를 빛낸다)의 관인문학을 성실히 몸으로 실천해갔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 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됐습니다.

이정귀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浩蕩: 세차게 내달리는 느낌)하고 표일(飄逸: 세속의 때가 없는 느낌)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편, 장유도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칭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 내용이 알차고 문장이
세련된 글)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했다 합니다.

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사대부가 마땅히 해야 할 순수한 문학을 창작으로 실천하면서도 「무술변무주」등의 외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실용문을 써 이름을 알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이정귀의 문학은 한편으로 이웃 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를 위한 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쓸모를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으며 높이 평가 합니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月沙集)』 68권 22책이 전해 옵니다.

[Daum백과] 이정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인용했습니다]

마음에만 품어 왔던 곳을 오게 되었습니다.같이 가자 같이 가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 같이 가자며 세월 보내다
오늘은 생각지도 않게 오게 되니 감개 무량 합니다. 봉분이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있는데 묘비를 읽어보니 좀 이상합니다. 어느것이 이정구 선생님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래 위로 다시 올라다니면서 묘비를 읽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지 묘를 쓸때는 위에서 부터 아래로 내려 쓰는데 아무리 봐도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조성된 월사 이정구선생의 묘소는 월사 선생의 묘소가 제일 앞에 있으며 위로 인조 때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장손 이일상(李一相)의 묘가 있으며, 그 위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장자 이명한(李明漢)의 묘가 있습니다. 후손의 묘가 위에 있는 것은 순서대로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올 묘 자리라 하여 반대(易葬)로 묘를 썼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묘자리를 쓰면 큰일 나는지 알고 어느 가문이나 이렇게 묘를 쓰는 집안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장자 이명한(李明漢)의 묘


인조 때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장손 이일상(李一相)의 묘


가까이서 본 세분의 묘 앞이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 가운데가 장손 이일상의 묘
맨위가 장자 이명한의 묘


연안이씨삼세비각을 지나면서 올려다본 세분에 묘


연안이씨 삼세비각

이정구 선생은 이문화국(以文華國: 글로써 나라를 빛낸다)의 관인문학을 성실히 몸으로 실천해갔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 모범)을 보였다 했습니다. 그래서 찿아뵙고 싶었던 분을 오늘 뵙고 재배를 올린뒤 한참을 머무르며 그분의 향기를 느끼고 왔습니다. 나오는길에 가평군 의회 의장을 지낸 그분의 후손인 이면유님에게 전화를 하니 반색을 하며 미리연락을 주셨으면 안내도 하고 월사집 목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3호)을 보여드릴텐데 합니다.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이제 오는길도 알았으니 자주 오겠습니다. 나오는길에 항상 같이 가자던 분에게 사진 몇장 보냈습니다.
발걸음이 가볍다는 말도 마음이 가벼워 진다는 말도 이런것인가 봅니다. 황금 들녘이 오늘따라 풍성해 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청평에서...
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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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시물

Thanks for your work as well! Followed @cjsdns

Great post and I wish steemit had a sticky or pin option because this is one of those special pos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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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 반대로 묘를 쓰는 경우도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역장으로 역모의 기운을 누른다
어쩌면그 덕에 평안하게 가문을 이어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다시 찾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전시회 했으면 좋겟습니다.
소풍겸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