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컥!

in krsuccess •  3 days ago 

“벌컥!”
옆집 젊은 남자가 험하게 문을 여는 소리가 아무런 전조도 없는 교통사고처럼 휴일 한낮의 적막을 깨고 내 뇌 속으로 슥 들어온다. 칼로 연한 두부를 자를 때 힘을 빼고 가볍게 밀어 넣듯이 스윽. 내 뇌가 두부가 된 것 같다.

갑자기. 두부 요리가 먹고 싶어진다. 인간의 뇌를 요리하는 장면이 나왔던 영화 ‘한니발’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이 영화를 아직 못 보신 분들께 죄송)

“빠각!”
실은 “벌컥!”보다는 이 소리에 훨씬 더 가깝다.

손잡이를 끝까지 돌리지 않은 채로 세게 문을 열면서 미처 다 들어가지 않은 도어래치(걸쇠)와 고정된 쇠 플레이트가 강하게 마찰하는 소리다. 그리고. “쿠당탕탕탕!~” 그가 집에서 나갈 때는 이 소리가 바로 이어진다.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소리다.

옆집 남자가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문 닫는 소리도 컸다. “빠각!” 다음에 바로 “쾅!”이 붙었다. ‘아주 조금’ 과장하면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1층 현관 앞에 문을 살살 닫아달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효과는 없었다. 위층에 사는 집주인이 각 세대를 찾아가 직접 부탁하고 옆집 남자의 문 앞에 쪽지가 붙고 나서야 비로소 “쾅!”이 사라졌다. 하지만 “빠각!”은 여전히 남았다. 아마 몇 개월 내로 문 손잡이는 망가질 테고 문을 고칠 때 집주인과 옆집 남자의 ‘대화(작은 다툼)’ 소리가 들릴 것이다.

가끔. 아니, 자주. 난 그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가 매일 몇 시에 나갔다가 들어오는지 가족처럼 (어쩌면 가족보다 잘) 안다. 특히 아침 6시~7시 사이에 옆집 남자의 코 고는 소리가 벽을 뚫고 들어와 작지만 집요하게 내 고막을 자극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방음이 잘 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집에 십 년 넘게 살며 옆집 사람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코 고는 소리가 넘어온 건 처음이었다. 요즘에는 그의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창 밖에서 들리는 청아한 새소리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소리는 우리와 그 원천 사이에 모든 장소를 ‘점령’하는 듯하다.” 음악학자 빅토르 주커칸들의 말처럼, 난 ‘점령’당했다. 원하지도 허락한 적도 없지만. 물론 옆집 남자 역시 원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다. 혼자이고 싶을 때는 귀마개를 낀다. 형광 노랑 색깔의 귀마개가 가장 차음 효과가 높다. 두 시간 이상 끼고 있으면 귓구멍이 아픈 것이 흠이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벌컥!”은 의성어일까 의태어일까.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는 많은 언어에는 표의음 ideophones과 동사 보조사, 분류사 classifiers 같은 낯선 품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많은 언어에서 표의음은 소리를 통해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대화의 묘미를 높이고자 사용되며 별개의 품사를 구성한다. 인도 동부의 문다리족어에서 ribuy-tibuy는 살찐 사람이 걸을 때 엉덩이가 비비적거리는 소리나 광경, 동작을 나타낸다.” - <진화하는 언어> 중.

내게 “벌컥!”은 표의음이다. 어떤 동작, 의미, 의도, 상태를 표상하는 소리다. 성향이나 성격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소리를 들을 때면 옆집 남자의 포즈, 몸의 움직임, 표정 같은 시각적인 겉모양 역시 눈앞에 떠오른다. 음. 문다리족어의 예를 보니 덧붙일 말이 생각난다. 옆집 젊은 남자도 살이 좀 많이 찐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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