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16

in wisdomandjustice •  7 years ago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루즈벨트.jpg

그동안 번역작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번의 포스팅에 이어 이번에는 소련이 어떻게 북한이 권력을 수립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나갔는가를 정리했습니다.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도 전에 이미 북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리한 글입니다.

동시에 북한의 소련 지도부는 남로당에게 모스크바 회담의 신탁통치결정을 지지할 것을 지시했으며, 또한 북한지역에서 합의에 대한 지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신문에 그런 내용을 게재하고 그런 내용을 팜플렛으로 분배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들은 1월 4일 5개도 임시 인민위원회의를 소집했으며, 이 기구에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하도록 함으로써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를 보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련 군 장교와 공산당 지도자들은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지지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위대한 민족주의 지도자는 위원회의 수장으로 남아 있으라는 그들의 모든 호소를 거부했다. 그대신 그는 자신의 지위를 사임함으로써 1월 4일의 부정한 투표에 항의했다. 한편, 그가 더이상 중립적 정당과의 협조를 보여주는 증거로 더이상 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군 지도부는 그를 가택연금을 시켰다.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안전을 우려하여 서울로 넘어갔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지도자를 신속하게 제거하고, 슈티코프는 1월 6일 평양에서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을 지지하는 군중 시위를 조직했다. 그들이 모스크바에 보내 소련의 신문에 보도한 언론의 추산에 따르면, 10만명의 참가자들은 레닌, 스탈린 그리고 김일성의 초상화를 들고, 태극기, 성조기, 영국기 및 중국국기를 흔들었으며, 신탁통치 결정을 완전하게 승인할 뿐만 아니라 조선 인민들은 자신들의 해방자인 적군(소련군)과 그 지도자 스탈린 원수에 감사한다는 기치도 내걸었다. 기치는 “모스크바 3상회의는 조선의 자유,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 건설을 보장한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에서 신탁통지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시킨 소련군은 남한의 비공산주의 정치지도자들을 비민주주의자로 규정했으며 이는 새로운 국가 정부의 구성에 그들이 참가할 자격을 박탈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월 12일 소련 공산당의 이즈베스치야 신문은 이승만, 김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을 한국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의 표시로 칭송받고 있는 모스크바 합의를 반대하는 반동분자이며 친일파라고 비난했다

조만식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에 두려움을 느낀 것은 옳은 일이었다. 12월 말 소련의 고위관리인 소련군의 정치행정 책임자는 개인적으로 북한지역에서의 정치적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몰로토프에게 촌락에서지주들의 경제적 우위가 북한의 향후의 민주적 전환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으며 대중들의 정치적 활동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소련의 담론에서 “민주적”이란 서방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막시스트 류의 사회민주주의를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이란 열성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친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쉬킨은 권력의 중앙집권화와 이를 소련이 정의한, 조선의 “민주적” 인물에게 넘길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러한 목표는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고 훈련된 적절하게 충성스러운 인물을 필요로 했다. 쉬킨은 소비에트 인사부에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지닌 한국인들을 찾을 것을 제시했다. 이런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소련의 정치적 위치를 강화해야 하며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삶을 올바르게 바로잡을 수 있어야 했다. 그는 또한 북한의 소련 지도부가 가능한한 신속하게 토지개혁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사실 소련 장교들은 이미 충성스런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1945년 11월 그들은 평양에 정치학교를 설립하여 행정가와 기술자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교육받은 사람들이 책임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 이것은 시급한 요구였다. 학교의 8개 분야중 절반은 경찰업무를 위한 요원을 준비했으며 이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성을 의미했다. 나머지 절반은 당과 정부 그리고 사회조직-농민동맹, 청년동맹 또한 여성동맹 같은-을 위한 한국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볼세비키 역사를 160시간, 당 건설을 600시간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을 140시간, 현재의 정책을 150시간, 세계 경제 정치지리를 150시간 그리고 러시아어 70시간의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1946년 4월 500명의 학생들이 이 과정을 수료했으며 1370명이 등록을 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소련의 지도부와 공산주의자들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작동하기도 전에 어떻게 북한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통제를 신속하게 확보했는가를 알아 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Russian State Archive of Social-Political History, Fond 17, Opis 128, Delo 205, Listy 2-4;

Scalapino and Lee,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Part I;

Joungwoon A. Kim, “Soviet Policy in North Korea,” World Politics Vol. 22, No. 2 (January 1970);

Archive of the Foreign Policy of the Russian Federation, Fond 18, Opis 8, Delo 78, Papka 6, List 2;

Jeon Hyun Soo, “Sotsial’no-ekonomicheskie preobrazovaniia v severnoi Koree v pervye gody posle osvobozhdeniia, 1945-1948” (Social-Economic Transformation in North Korea in the First Years after Liberation) Ph.D. Dissertation, Moscow State University,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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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이 남쪽에 왔으면 어떨가 싶기도 하지만 이승만도 김일성보다는 못하지만 정적 제거에 일가견이 있으니 좋은 꼴은 못 보지않았을까 싶군요.

정적제거는 김구선 생께서 조금 앞서셨지요

그분은 한국전쟁 전에 본인도 당하셨으니....

강대국에 의해 굴절되는 우리의 역사
그 속에서 우리는 정작 무엇을 했을까요?

남이나 북이나 강대국의 손바닥에서 춤을 춘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내용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