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1940년대 한국 영화 : 아날로그가 미래다
KMDb 사이트에서 VOD 서비스하고 있는 411편의 한국 고전 영화(극영화) 중에서 제목이나 작자 미상인 경우를 제외하고 러닝 타임이 짧은 영화 순으로 순위를 매겨 보았다. 물론 복원이 완전하지 못한 이유로 러닝타임이 짧은 영화도 있지만. VOD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는 러닝타임을 기준으로 한, 10편의 목록을 살펴보자.
-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 / 이익, 강야진일 / 1939 - 9분
- 심청전 / 안석영 / 1937 - 14분
- 검사와 여선생 / 윤대룡 / 1948 - 39분
- 대괴수 용가리 / 김기덕 / 1967 - 48분
- 자유만세 / 최인규 / 1946 - 51분
- 독립전야 / 최인규 / 1948 - 52분
- 어화 / 안철영 / 1939 - 52분
- 비무장지대 / 박상호 / 1965 - 62분
- 봄봄 / 김수용 / 1969 - 65분
- 불사조의 언덕 / 전창근 / 1955 - 72분
10편의 영화들 가운데 4편을 제외한 6편이 마침 1930년~1940년대 영화이기에, 그 6편을 한데 묶어 이번 기획전을 준비해 보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 지식이 깊지 못한 내게 한국 영화사를 공부하고, 고전 영화를 체험해볼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한 편씩 보았다.
1937년 <심청전/안석영>
어릴 때부터 익히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지금으로부터 7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해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는 1935년의 <춘향전/이명우>이다. 이후의 영화인 <심청전>은 필름의 스크래치로 비도 많이 내리고 편집의 문제로 화면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고 튀지만, 배우들의 목소리 싱크가 잘 맞는 편이다. 특히 심청이가 밤에 바느질하며 슬피 우는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가야금 소리나 우리나라 전통 민요인 듯한 노래가 인상적이다. 인서트로 나무나 산, 부처상 등을 보여주는데, 그때부터 벌써 인서트를 썼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또한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뒤로 천천히 빠지거나 패닝하여 잠든 심봉사의 모습을 보여줬다가 다시 바느질하는 심청의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눈에 띄었다.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려는 찰나 필름이 완전하게 복원되지 못한 관계로 14분의 러닝타임으로 영화가 아쉽게 끝나버린다. 발성 영화 시기에 조선의 미를 대표하는 문예봉, 김신재와 더불어 세 여배우 중 한 명인 김소영이 영화 속에서 심청으로 주연을 맡아 영화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1939년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이익, 강야진일>
지금으로 따지면 시골 이장과 비슷한 개념일 듯한, 구장이라 불리는 노인이 우물의 물을 길어 계속 나른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두 여인네가 그의 뒤를 따라간다. 구장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경작지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쓰러진다. 쓰러진 구장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온 두 여인네에게 말하는 긴긴 설교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다. 대사로 이 영화의 모든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한. ‘아무쪼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 주시오’라고 말하며 긴 설교를 마치자, 많은 아낙네가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경작지에 물을 나른다. 곧 등장하는 군인 두 명이 아낙네와 나누는 대화는 구장의 진두지휘 아래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하는, 새마을 운동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아마도 그 당시 국책영화(작품 그 자체의 예술성이나 가치관에 의하여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의 시책을 보급하기 위하여 만드는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가 아닐까 싶다.
1939년 <어화/안철영>
앞서 소개한 두 작품과 함께 러시아의 필름 아카이브인 ‘고스필모폰드’에서 수집한 영화로 일부 영상만 남아 있어 러닝타임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그나마 9분이나 14분이 아닌 52분의 러닝타임으로 극영화로써의 재미가 살짝 느껴지는 작품이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시작되는 영상에서 뭔가 영화다운 느낌이 난다. 한복을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길게 땋은, 흡사 유관순 열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당시 여성의 모습과 대비되게 양장을 차려입은 남성의 모습, 자동차가 다니는 1930년대 서울의 거리나 술집, 커피숍 등을 볼 수 있었다. 경제적 독립을 운운하며 주인공 인순에게 조언하는 옥분의 모습에서, 옥분이 철수의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마냥 순종적이거나 의존적이지만은 않은 그 당시 여성상을 느낄 수 있었다. 부잣집 아들인 철수가 인순을 꼬시기 위해 반지를 선물하거나, 순수하게 인순을 사랑하는 천석이 그녀에게 시를 읊어주는 장면을 통해 옛날 영화지만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캐릭터들의 전형을 발견했다. 이야기는 돌고 돌며 반복되는 것인가 보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바닷가에 앉은 인순과 천석. ‘사람은 변했어도 허나 사랑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라고 말하는 천석의 대사. 통속적인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었다.
1946년 <자유만세/최인규>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극영화이다. 영화 시작 전에 ‘민족을 위하여 이미 가신 거룩한 님들의 피 묻은 자취를 다시 더듬어봅시다’라는 문구를 보여주며 이 영화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곧이어 처음 등장하는 화면은 그 당시 독립문의 모습이다. 남자 주인공을 마음에 둔 두 여인 미혜와 혜자의 도움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한중. 결국 마지막에 일본 경찰로부터 탈출에 성공하지만, 후일담으로 전해지는 유실된 필름의 내용은 끝내 8월 15일 동트기 전 새벽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그 셋의 대사는 직접적이면서도 많은 것을 내포한 듯 보인다. ‘애인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소? 한국은 내 애인인데’라고 말하는 한중의 대사나 미혜가 ‘애인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어’라고 하는 혼잣말이 그들이 말하는 애인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광복 영화이지만 멜로드라마 플롯을 삽입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한중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상심한 채 거리를 걷는 혜자. 그녀의 눈앞에 어린아이 하나가 자기보다 작은 아이를 때리고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너보다 작고 약한 애를 왜 때리는 거지?’라고 말하며 그 아이를 한 대 때려준다. 너무 직유법이라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시대적 주제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1948년 <독립전야/최인규>
광복 이후 1946년에 4편, 1947년에 13편에 이어 1948년에 22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만큼 한국영화는 점차 안정을 찾아간 듯하다. 이 작품은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죄 없는 죄인>과 더불어 이른바 광복영화 3부작 중의 하나인 영화다. 최인규는 <심청>의 녹음 기사 보조로 영화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고, 이후 친일영화에서 광복영화까지 만들어낸 감독이다. 이 작품에선 남자주인공 경일의 역할도 맡고 있다. 영화 제목처럼, 이 영화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변사의 목소리와 함께 남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흥미롭기도 하였지만 KMDb 사이트의 줄거리를 미리 읽지 않고서는 내용 파악이 쉽지가 않았다. 양복에 크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남성과 한복에 하얀 하이힐을 신은 도도한 여성, 긴 한복을 입었지만 도박판에서 담배를 피우며 종아리를 훤히 드러낸 여성, 창고에서 도박과 대마초를 즐기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제 그 당시 사회상일까 싶었다. 결국엔 인과응보인 듯 죽음을 맞이하는 선희의 아버지.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꾸준히 뭇 여성들을 겁탈하려고 했던 성추행범인데(딸인 선희마저도 못 알아보고 겁탈하려 했던) 자신의 재산을 나라를 위해 쓰라고 유언하고 죽은 후 뭔가 순순히 용서받은 듯한 분위기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새 정부가 수립된 첫날이니만큼 남은 네 젊은이의 모습에서 마지막 장면을 뭔가 희망적으로 마무리하려 하지만, 의도적인 국책영화임을 간과할 수 없었다.
1948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발성영화 시대임에도 무성영화로 만든 작품. 중간중간 자막이 나오는 데다 통속적이고 단순한 내용의 앞선 다섯 작품과 비교할 때 제일 재밌게 본 영화이다. 흔히 말하는 신파극이라고 하는데 신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는 영화박물관 안 원각사에서 상시 상영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 그곳에선 신출이라는 변사의 목소리를 따로 틀어서 무성이 아닌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어릴 적 가난한 학생 장손을 도운 여선생이 훗날 검사가 된 장손의 도움으로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되고, 장손은 은혜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아역 장손에서 성인 장손으로 바뀌면서 시간의 흐름이 있는데, 여선생님은 그대로고 성인 장손은 훌쩍 늙어서 선생님보다 장손이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점이다. 어색한 연기지만 여선생의 따뜻한 심성이 묻어나는 행동들은 당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듯싶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무성영화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러닝타임이 짧은 1930~1940년대 영화 6편을 모두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보았다. 이번 기획전의 제목과 같이, 오래된 필름이지만 발굴해, 복원해내는 사례들을 통해 역시 ‘미래는 아날로그’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책도 디지털로 읽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종이책이 유용하고 고서도 잘 보존되고 있다. 우리 영화도 디지털로 많이 만들어지지만, 여전히 곳곳에 숨어있는 소중한 필름들이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버리거나 하찮게 생각하지 말고 잘 복원하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지금 영상자료원이 잘해나가고 있는 임무이기도 하다. Don't throw film away.
다시 한번 ‘아날로그가 미래다’를 외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
※ 참고 : 한국영화사 / 정종화, www.kmdb.or.kr
★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매년 진행하는 <도전 나도 프로그래머> 이벤트에 2012년 응모했던 글입니다.
★★
첨부된 이미지는 제가 더이상 소장하지 않는 VHS를 처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프로그래머라는 표현을 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부터 떠오르네요..
옛날 영화들은 역사상 의미가 있지만 정말 뛰어난 몇몇 영화 빼고는 이제 와서 다시 보긴 힘들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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