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심문보고서
포로심문보고서는 6.25전쟁 당시 연합군총사령부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연합 통・번역국에서 노획된 북한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심문한 결과를 종합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각 지역별로 벌어진 전투를 교차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한 사료이다.
춘천전투와 관련된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를 발췌해서 번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25일 대략 05:00경, 사단 포병연대의 포들과 소총연대의 지원화기들이 사격을 개시하는 가운데, 이날 오후까지 춘천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은 북괴군 제4연대와 제6연대는 나란히 38선을 넘었다. 6연대는 북한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로 춘천으로 진출했고, 4연대는 춘천시 북방 고지군을 따라 남쪽으로 전투를 전개했다. 17연대는 38도선 바로 북방 저수지에 위치했다. 제6연대는 방어하던 한국군의 강력한 포병화력에 직면해 6월 26일 아침까지 악전고투했다고 한다. 17연대가 지원을 위해 이 지역으로 즉각 급파되어 춘천 북방 변두리에 있는 높은 산인 봉의산을 점령했다. 4연대가 6연대와 17연대에 합류했고, 이 세 부대는 격전을 펼치며 마침내 한국군을 격퇴시키고 계획된 것보다 2일이 늦은 6월 27일 춘천을 점령하며 시가지로 모여들었다. 제2사단은 그들의 전체 전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상자로 고전했다고 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6연대 단독으로만 50%의 사상자가 났다. 사상자 대부분은 한국군의 포병 화력이 가해졌다고 진술한다. 부상자들의 대부분은 266 의무대대의 266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지천리에 위치했다고 진술한다. 이 전역에서 대략 7대의 SU-76 자주포가 한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춘천 점령 즉시 사단은 춘천-서울간 도로 상의 가평으로 이동했고, 일부 한국군 후방부대와 교전하긴 했지만 6월 28일 가평을 점령했다. ATIS 심문 보고 제71호 1950년 7월 24일 현장 보고 제34호 1950년 7월 19일 성명: 김광희 계급: 일병 나이: 24 소속: 제2사단 4연대 재정부대 직책: 재정 경리병 교육: 중졸 직원: 은행원 주소: 함북 나진군 광하명 심문자: 이노모도 중사 평가: 피심문자는 꽤 똑똑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답변함. 다만 그가 연대의 행정 부서에 보직했다는 사실로 볼 때 전투서열에 대한 정보와 화기에 대한 관련 수치는 신뢰할 수 없음. 군내 경력 도입부 - 1950년 5월 7일 청진에서 징집. 대략 1000명 정도가 북괴군 장교에 의해 사전통보도 없이 청진 인근에서 강제 징집되었고, 신체검사를 통과 하자마자 열차로 함흥(간교)으로 보내졌다. 해안선을 따라 청진에서 함흥까지의 여정은 이틀이 걸렸다. 훈련- 제2사단 사령부는 함흥에 위치했다. 제2사단 전체가 함흥 내외곽에 있던 일본군 막사를 임시숙소로 사용했다. 앞에서 언급한 1,000여명의 징집자들은 제2사단 예하의 다양한 부대로 배치되었다. 심문자는 그의 과거 경력으로 인해 어떠한 훈련 없이 재정부대로 보직되었다. 전술적 이동 - 제2사단은 46년 1월쯤 편성되었다. 1950년 6월 12일 제2사단의 선두제대가 기차를 이용해 김화로 출발했다. 사단 전체 수송은 6월 14일에 완료되었다. 제2사단은 화천으로 행군했고, 6월 16일까지 화천에 사단 사령부를 구성했다. 6월 18일까지 제4연대가 38도선 바로 북쪽의 양구-춘천간 도로를 따라 위치했다. 6연대와 17연대는 38도선 바로 북방의 화천-춘천간 도로를 따라 위치했다. 제2사단의 H시는 6월 25일 05:30분으로 정해졌다(전해들은 말). 포병 연대와 소총 연대의 기타 지원 화기가 H시 30분전에 포문을 열고 사격을 개시했다. 제2사단의 3개 연대가 그들의 첫 번째 공격목표인 춘천을 향해 나란히 38도선을 넘었다. 제2사단의 세 개 3연대의 협공으로 인해 한국군은 1950년 6월 28일 춘천으로부터 철수했고, 제4,6,17연대는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다. 1950년 6월 29일에 세 개 연대는 춘천에서 합류했다. 춘천 점령을 위한 전투에서 제2사단 병력의 40%가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전과의 대부분은 한국군 포병의 공로였다. SU-76자주포 7대도 한국군 포병 화력에 파괴되었다. 이후 제2사단은 가평과 금공을 통해 서남부로 향했다. (이후 생략) 러시아 장교들을 38도선에서 마지막으로 목격. 2사단이 수행한 모든 작전에서 탱크는 전혀 보지 못했으며, 인접부대 모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는 6월 26일 소양교에서 전투가 벌어져 북괴군 Su-76 자주포가 파괴된 증거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이 증거로 내세운 부분은 “제6연대는 방어하던 한국군의 강력한 포병화력에 직면해 6월 26일 아침까지 악전고투했다고 한다.”이다. 반면에 육군군사연구소는 특별히 포로심문보고서를 활용하고 있지 않다.
보고서 주요내용 자체를 비교 및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고서 전사부분에는 적 2사단이 춘천을 점령한 날짜가 6월 27일이라고 한 반면에 포로 심문보고서에서는 6월 28일이라고 한 것은 다른 자료와 비교해 볼 때, 6월 28일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 보고서의 핵심은 한국군 포병의 활약 덕분에 적 2사단의 사상자 40-50%가 발생했고, 북괴군은 계획된 날짜보다 3일 늦게 춘천을 점령했다는 것, Su-76 자주포 7대도 포병사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점 등이다. 이 부분은 향후 춘천전투 정리시 활용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며, 자주포 7대가 파괴된 것도 그 수량에 대해서는 한국군 자료를 통해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 고문관들은 38도선까지는 북괴군과 동행했지만, 그 이후에는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춘천지역에 투입된 것은 전차가 아니라 자주포였으며, 각종 전사기록(2종의 전투상보, 16포병대대 부대역사일지)에 등장하는 장갑차의 투입여부는 추후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다.
이렇게 볼 때, 심일의 자주포 파괴와 관련된 증거자료로 활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6월 26일 적이 아군 포병의 강력한 포격으로 인해 고전했던 것을 26일 소양교에서 전투가 있었고, 자주포가 파괴된 증거라는 주장은 너무 확대 해석되었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이 보고서에서 북괴군 제2사단이 공격준비를 위해 6월 12일 선발대가 기차를 이용해 김화에 도착했고, 본대는 6월 14일 이동이 완료되었다는 점, 이후 행군으로 6월 16일 화천에 도착했고, 6월 18일까지 4연대가 양구-춘천 간 도로를 따라 위치, 6연대와 17연대는 화천-춘천 간 도로를 따라 위치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어 이를 북괴군 공격준비 상황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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