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2(일)역사단편263. 역사이야기 읽는법

in hive-143843 •  yesterday  (edited)

전쟁이 많았던 대륙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달리
기록으로 잘 남아있다.
유명한 전투기록들이 많은데
그 이야기를 읽을때 조금은 신경써야 한다.
소설처럼 생각하고 읽으면 착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전에 있었던 전투를 살펴본다.
소위 '백등산전투'다.

산서성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흉노(?)가 한나라 고조
유방을 백등산에서 포위했다가 일주일만에 풀어준 사건인데
그 전말을 보자.

한고조 6년 기원전 201년 9월,
흉노의 묵돌선우가 군대를 이끌고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한왕 신信을 마읍馬邑 (지금의 산시성 삭주 서북쪽?-삭)에서 포위했다.

이 기록을 지도를 통해 살펴본다.
(1)묵돌선우가 군대를 이끌고 태원太原을 공격
(2)한왕 신信을 마읍馬邑 (지금의 산시성 쉬저우시 서북쪽?-)에서 포위

흉노태원한왕신공격.JPG
[그림1]삭주朔州에서 태원까지 146km다. 마읍은 삭주의 서북쪽?

선우가 출발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태원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태원을 공격했고
마읍이라는 곳에서 한나라 군대를 포위했다는데
마읍이 한참 북쪽인 쉬저우(삭주)朔州에 있다고 적어놨다.

주)여기서 한왕 신信은 한신과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다.
구별하기 위해 [한왕 신]이라고 부른다.

다음상황을 보자
(3)한왕 신은 흉노에 항복하고, 흉노와 연합하여 남쪽으로 한나라를 공격

백등산동체침현전쟁루트.JPG
[그림2]
(4)한고조 7년(BC200) 초, 유방은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한왕 신을
동제 銅鞮<지금의 산시성 심현(沁县친현 남쪽) 에서 격파

흉노와 한왕신이 남하하자 한고조가 북진하여 표시된곳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북진한다.
(5)진양 晉陽 <지금의 산시성 태원시 남쪽 진원진晋源镇>에서 흉노와의 연합군을 격파

백등산전투진원진.JPG

[그림3]
동제에서 승리하고 북진을 해서 태원에 있는 흉노+한왕신 연합군을
격파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부터는 중국측이 비정한 지명들의 위치가 어이없다는 사실이
꼬리를 물게된다.

(6)유방은 흉노 군대가 대곡代谷<지금의 산시성 번시繁峙 서북쪽>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공격하려 했다.

백등산전투대곡.JPG
[그림4] 대곡代谷, 전투장소에서 188km거리

서울시청에서 전라북도 익산까지의 거리다.
군대를 운용할때 이런 식으로 배치를 할까?

다음을보자.

(7)정보의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참모가 말렸으나,
유방은 듣지 않고 선두 부대를 이끌고 평성平城( 지금의 산시성 대동시 동쪽)에 도착했다.

백등산태원에서평성.JPG
[그림5] 진양전투장소에서 평성까지는 310km

서울부산.JPG

정보만 믿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추격했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을까?

백등전투결말.JPG

(8)묵돌 선우는 40만 정예 기병으로 유방을
백등산白登山(지금의 산시성 대동시大同市 동북쪽)에서 포위했다.
7일 동안 한군은 내외 연락이 끊겨 구원할 수 없었다.

처음에 흉노가 주둔했다는 지역이 청색타원지역인데
유방의 군대가 붉은색선으로 진격하여 대동시 동쪽 어딘가에서
포위되었다가 일주일만에 풀려났다는 기록이다.
40만의 군대가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이 전투기록 자체는 문제가 없다.
나중에 지명의 위치를 조작하면서
기록과 어긋나게 된 것이다.
역사를 읽을때, 지도를 함께 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의 지명이 기록과 대조했을때 말이 되지 않으면
그 지명은 나중에 옮겨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대륙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지명과 현재의 지명은
완전히 다르다. 그걸 알지못하면
영원히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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