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6.steemCreated with Sketch.

in koreanwarhistory •  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에는 한국 임시 위원회가 한국에 도착해서 곧바로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는 과정을 정리했다. 소련과 북한은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고 이승만은 즉각적인 선거를 주장했다. 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시위와 사보타지가 전개되어 3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유엔한국임시위원회는 한국문제를 다시 유엔 중재 위원회로 넘기게 된다.

한국의 초기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결국 남한이나 북한모두 미국과 소련의 국가 이익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따지는 것도 무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곧바로 끝날 것이 확실해지자, 미국, 소련 그리고 일본은 전후의 세계에서 자신들이 유리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기를 쓰기 시작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자 마자, 스탈린은 8월 9일부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는 일본이 항복하기전에 전쟁에 참가하여 얄타회담시 약속했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곧바로 항복할 것이므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점령당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미국에 간청했다. 처음에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미국은 갑작스럽게 소련의 만주와 한국에 대한 팽창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한반도를 두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하는 운명적인 조치를 제안하게 되었다. 소련은 이 제안을 받아 들었으며, 이는 그들이 전후 일본에 대해 가능한한 최대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들에게 일본에서의 그들의 점령지역을 당연하게 수용하게 하거나 적어도 일본에 대한 연합국 통제 위원회에서 보다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1948년 1월은 한국에 있어서 유사한 순간이었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UNTCOK의 도착은 모든 이해 당사자들에게 한국의 미래 정부에 대한 문제가 곧바로 결정될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예정된 선거에 반대하기 위해서 북한의 권력기관은 전체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헌법을 발표할 준비를 했다. 2월 16일 평양의 인민위원회는 몇달안에 전체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남한의 좌파 정당들은 조직적인 파업과 사보타지를 수행하여 미국이 점령한 지역에서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동조했다. 이후 몇달동안, 이러한 행동들로 인해 약 300명이 사망하고 1만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하지 장군의 좌파들의 사보타지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봉쇄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치는 UNTCOK 위원들의 우려를 초래했다. 캐나다의 조지 패터슨과 호주의 잭슨은 미국 지휘관의 전술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의 활동 정지를 요구했다. 다만 중국의 리 유완과 프랑스의 쟝-루이 폴 봉쿠(Jean-Luis Paul-Boncour)는 선거가 불완전하더라도 수행해야 하며 북한지역에 잇는 한국인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수용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수립하여야 하며 그럼으로써 남한이 소련이 지원하고 있는 북한의 장악시도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선거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위와 정치적 폭력을 조직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 장군은 한국의 경비대를 정규군으로 확장하여 한국의 어떠한 정치적 성향들도 새로운 정부와 치안부대를 타도할 수 없도록 하길 바랐다.

하지 장군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이후 계속되고 있던 미군의 동원해제가 확대됨에 따른 결과였다. 그의 제6보병사단은 1947년 초 1만 6천명의 장병에서 1948년 초에는 3200명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의 경찰이나 경비대의 지원없이, 제6사단은 한국의 남부는 고사하고 스스로도 보호할 수 없었다. 안보상황이 불안정해지자, 하지 장군은 만일 UNTCOK가 한국문제를 다시 유엔으로 가져간다면 상황이 매우 재앙적으로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정무고문관 조셉 야콥스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UNTCOK는 단독 선거는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유혈내전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2월 6일 위원회는, 한국의 미래 정부를 결정하는 당사자들에 대한 선거를 유엔이 승인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문제를 유엔 중재위원회에서 재고하도록 할 것을 결정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2월 유엔에서 한국과 한반도에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논의를 알아 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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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그당시 아쉬운 부분도 많죠 그때 남북한의 하나의 정부가 세워 졌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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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말입니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비극이지요

자신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맞기고 만
힘없는 민족의 슬픈 역사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잘 되새겨야 앞으로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지요

국력이 약하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일어났군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강해야 하는 것이지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는 강하지 못하면 나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