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awakenings) / 올리버 색스

in kr-books •  6 years ago  (edited)

환자가 된다는 것은 통증도 통증이지만, 세계로부터 격리됨을 의미한다. 격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으로 위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및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통증으로 인한 불편은 삶에 큰 제약을 가하며 특히 환자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일조하게 마련이다.

심한 병 때문에 한 번이라도 환자로서 살아본 경험이, 특히 한 달 이상의 입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가 좀 더 와닿을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쓴 깨어남은 거의 50년 동안 중증 환자로 살아온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1920년쯤 전세계에 불어닥친 수면병의 여파로 인해, 파킨슨병과 증상이 비슷하지만 거동을 거의 할 수 없는 더 심한 수준의 질병 안에 갇혀 평생을 요양시설(마운트카멜 병원)에서 지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이 요양시설에 부임하여 엘도파라는 신약의 치료 가능성을 믿고 환자들에게 투여하기 시작한다. 이후 걷지 못 하던 사람이 걷고 말 못 하던 사람이 말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하지만 이런 '깨어남' 이후에 '시련'의 시기가 거의 대부분에게 찾아온다. 증상이 엘도파 투약 전보다 더 악화되기도 하고 약의 용량을 어떻게 조정하여도 잘 반응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깨어남-시련 이후에 이어지는 '적응' 단계에서, 누군가는 이 시련을 통과하여 이전보다 안정적인 삶을 맞이하게 되고 누군가는 시련을 견디지 못 하고 죽어간다. 의사이자 목격자로서 올리버 색스는 한 명 한 명이 보였던 치료적 반응과 증상의 변화 추이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병례사 형식이다. 어떤 이론적 틀에 얽매임이 없이 현상을 기술하려 애쓰고 있고 그 현상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올리버 색스의 숙고가 담겨 있다.


환자들과 맺은 인간적 유대가 없었더라면 이 책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인다. 환자들은 올리버 색스를 믿고 내면 깊숙한 곳의 진실을 털어놓는다.(사실 말도 하기 어려운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올리버 색스가 환자의 도움을 받아 진실을 발굴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온 더 무브를 읽어보았는데, 그가 얼마나 인간의 주관적 경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의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환자들은 자신을 객체화된 대상이 아닌 한 명의 고유한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올리버 색스의 시선을 통해 세상과의 연결성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의사는 환자와 함께할 때 비로소 의사와 환자 사이에 놓인 심해,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았던 심해를 이어줄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접근법은 '주체'도 '객체'도 있을 수 없는 '투과적' 방법이다. 의사는 환자를 비인격적 대상으로 바라보지도, 자신과 동일시하며 주관을 투영하지도 않되 오로지 공감과 공명으로써 환자와 함께하며 그의 경험과 감정과 생각, 그의 행동을 형성하는 내면의 개념 작용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351쪽.

일례로 환시 경험이 때로는 환자의 현실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위축된 현실을 보강하는 쓸모 있는 기능을 할 때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환시를 일종의 "창조적 노력"으로 보는 것이다. 주관이나 객관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어떤 현상이 환자에게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무진장 애쓰는 올리버 색스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태도는 약물 용량을 조정함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약물이 환자가 보이는 반응을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환자의 반응은 이를 테면 날씨와 같은 것인데, 작은 차이가 날씨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작은 차이가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은 결국 한 개인의 정체성에 연관되기 때문에 엘도파 반응이 환자마다 달랐던 것일 수 있다.

특히 엘도파 투여 후 상황이 더 좋지 않아져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도 병상에서의 삶이 "괜찮은 게임이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로버트 O의 사례와 상태가 극적으로 좋아졌으나 지각된 거절에 마음의 문을 닫고 순식간에 무한정 안으로 움츠러든 루시 K의 사례가 대비된다.


이 책은 엘도파라는 약물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의사-환자-가족 공동의 노력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환자가 현실적 제약을 받아들이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만드는 힘은 환자를 둘러싼 관계에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약물이 증상을 일시적으로 호전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치료적 관계, 가족과의 관계, 그가 사회와 맺는 관계의 질이 '적응' 단계의 안정-불안정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임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좋은 관계가 광란의 미로 속에서 길을 인도하는 실마리가 되어 그녀를 무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끌어내주었다. 282쪽.

올리버 색스 책을 계속 읽고 싶은 것은 그가 환자의 주관적 경험에 큰 호기심을 갖고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는 태도에 반했기 때문이다.

견고한 관계는 재난에서 우리를 구해낼 생명줄이요, 망망한 고해에 뜬 북극성이자 나침반이다. 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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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포스팅할 시간이 적어서 여기 덧글 달겠습니다. 프로미스팀 덕에 독서량이 더 늘었습니다. 감사해요~!

주1권 독서하고 서평쓰기 #33 마지막 보팅입니다. (3/3) ^^
좋은 일주일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