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19(수)역사단편72 -평양패수고(5)

in hive-143843 •  15 days ago  (edited)

평양패수고를 계속 읽어간다.

1718777886641.jpg

오늘의 글에는
<응소應劭, 신찬臣瓚, 안사고師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응소와 신찬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후대의 안사고가 그 중에 선택을 한다.

第四의 錯誤(네번째 착오)

第四의 錯誤는, 古史를 讀(독)할 때 前後의 文例(문례)를 모르고
字句의 文義를 臆解(억해)하여,
僞證(위증)한 記錄을 發見할 機會(기회)를 없게 함이다.
이를테면
『漢書』 地理志 遼東郡 險瀆(한서 지리지 요동군험독)의 註에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故曰險瀆
(응소왈 조선왕만도야 의수험고왈험독)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신찬왈 왕검성재낙랑군 패수지동차자시험독야)
師古曰 瓚說是也(사고왈 찬설시야)」라 한 바,
「此自是險瀆(차자시험독)」의 「此」는 遼東郡 險瀆의 代名詞니,
<평양패수고>

文例(문례): 문장(文章)의 여러 가지 짓는 법이나 쓰는 법
臆解(억해): 억지로 맞춤

제4의 착오는
옛 사서를 읽을 때에
앞뒤의 문장을 짓거나 쓰는 방법의 실제 예를 모르고
문구의 뜻을 뜻을 억지로 해석하여
위증한 기록을 발견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이를테면 [한서 지리지] 요동군험독 에 대한 주석에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만의 도읍이다.
강물의 험준함을 의지하고 있으므로 험독이라고 하였다.
신찬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에 있다.
패수의 동쪽에 있고 이것이 험독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이 옳다"라고 한바,
'이것이 험독이다'에서 이것은 '요동군 험독'의 대명사이다.

계속 읽어본다

本註(본주)의 大義를 詳解(상해)하면 곧
「應劭(응소)가 遼東郡의 險瀆(요동군의 험독)을
朝鮮王 滿(위만)의 故都, 王險城이라 主張하니,
臣瓚(신찬)이 이를 反對하여 가로되
王險城, 朝鮮王 滿(위만)의 故都는 遼東郡에 있지 않고
樂浪郡 浿水의 東에 있는 者니,
「此(차)」 遼東郡의 險瀆은 彼(피) 王險城과 關係 없는
따로 있는 險瀆(험독)이라 하여,
應(응소)·瓚(신찬) 兩氏의 說이 서로 反對의 見地(견지)에 있으므로
師古(안사고)가
應劭(응소)의 說을 棄(기)하고, 瓚(신찬)의 說을 取하여
「瓚說是也(찬설시야)」의 斷案(단안)을 내림이니,
그 文意가 十分 明白할 뿐더러,
<평양패수고>

棄(기): 버리다
瓚說是也(찬설시야): 찬의 주장이 옳다.

주석의 뜻을 상세히 해석하자면,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이 조선왕 위만의 옛 도읍이다" 라고 주장하니
신찬이 이에 반대하여 가로되,
"왕검성, 즉 위만의 도읍은 요동군에 있지않고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동군의 험독은,
저 왕검성과 관계없는 따로 있는 험독이다"라고 주장하여
응소와 신찬의 주장이 서로 반대입장에 있으므로
안사고가 응소의 주장을 버리고,
신찬의 주장에 찬성해서
"신찬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을 내렸으니
문장의 뜻이 충분히 분명할 뿐더러

또 地理志의 各郡, 各縣 註(각군, 각현 주)에 據(거)하여 보더라도
假令(가령) 「金城(금성)」의 註에
應(응소)說에는
「城을 築(축)하다가 金을 得한 故로 金城이라 名하였다」 하며,
瓚(신찬)說에는
「金의 堅固(견고)의 義를 取(취)하여 金城이라 名하였다」 하여
應·瓚(응소·신찬) 兩氏의 金城에 對한 解釋(해석)이 서로 反對되니,
師古(안사고)가 「瓚說是也(찬설시야)」의 斷案을 내리며,
<평양패수고>

또 지리지의 각군, 각현 주석에 근거해서 보더라도
예를들어, '金城(금성)'의 주석에서
응소는,
"성을 쌓다가 금을 발견해서 금성이라 했다"라 하고
신찬은,
"금이 견고하다는 뜻을 취해서 금성이라 했다"라고 해서
두사람의 의견이 서로 반대되니
안사고가 "찬의 주장이 옳다"고 단정을 내린것이며,

靈丘(영구)의 註에
應(응소)說에는
「趙武靈王(조무령왕)의 葬地(장지)인 故로 靈丘라 하였다」 하고,
瓚(신찬)說에는
武靈王 以前부터 靈丘의 名이 있었다 하여
應·瓚(응소·신찬) 兩氏의 靈丘에 對한 解釋이 서로 反對되매,
師古(사고)가 「瓚說是也」의 斷案(단안)을 내리며,

靈丘(영구)의 주석에서
응소는
「趙武靈王(조무령왕)의 葬地(장지)라서 靈丘라 하였다」 하고,
신찬의 주석에서는
무령왕이전부터 '영구'의 이름이 있었다 하여
응소·신찬 두 사람의 '영구'에 대한 해석이 반대가 되니
안사고가 '신찬이 옳다'고 단정을 내렸으며,

其他 「臨晋(임진)」·「栒邑(순읍)」·「晋陽(진양)」·「蒲反(포반)」·
「脩武(조무)」·「梁(양)」·「尉氏(위씨)」 等 數十縣(수십현)의 註가 다
이와 같이 應·瓚(응소·신찬) 兩說이 反對되는 境遇(경우)라야
「應說是也(응설시야)」라 하거나 「瓚說是也(찬설시야)」라 하는
兩說의 一을 取하는 斷案을 내렸거니와,
<평양패수고>

그 밖에 「臨晋(임진)」·「栒邑(순읍)」·「晋陽(진양)」·「蒲反(포반)」·
「脩武(조무)」·「梁(양)」·「尉氏(위씨)」 등의 수 십개 현의 주석에서
이와 같이 응소·신찬 두 사람의 주장이 반대되는 경우라야
「응소가옳다)」라 하거나 「신찬이 옳다」라 하는
두 주장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내렸거니와,

만일 應(응소)說과 瓚(신찬)說이 獨立으로 是(시)하거나
瓚(신찬)說이 應說을 和同하여 是하면
비록 斷案이 없을지라도,
그 是가 自見(자견)함으로 煩文(번문)을 避(피)하여
그런 境遇(경우)에는
「應說是也」 或 「瓚說是也」란 句語가 없음이니,
이는 地理志를 一覽(일람)하면
昭然(소연)히 覺得(각득)할 文例인즉 前述한 바,
<평양패수고>

煩文(번문): 번잡한 문장
自見(자견): 저절로 보인다
昭然(소연): 환히 밝다
覺得(각득): 깨달아 얻다

만일 응소의 주장과 신찬의 주장이 독자적으로 옳거나
신찬의 주장이 응소의 주장과 일치하면서 옳으면
비록 단안이 없을지라도,
그 옳은것이 저절로 드러나므로
번잡한 문장을 피하여 그런 경우에는
「응소설이 옳다」 혹은 「신찬설이 옳다」라는 어구가 없음이니,
이는 지리지를 한번 보면
밝고 뚜렷히 깨달을 수 있는 사례인즉 앞에서 말한대로,

遼東郡 險瀆(요동군험독)의 註도
臣瓚(신찬)이 本 險瀆을 王險城이라 主張하는 應劭(응소)를 反對하여
王險城은 樂浪郡의 屬縣(속현)이요
此 遼東郡 險瀆과는 關係 없다.」는 異說(이설)을 發하였으므로,
師古(안사고)가 그 異義를 贊成(찬성)하여
「瓚說是也(찬설시야)」라 함이니,
그 前後의 文例에 依하여 그 文意가 더욱 明白하거늘
先儒들이 地理志의 文例를 알지 못하고,
또 險瀆(험독) 註의 文意를 잘못 풀어
「此自是險瀆(차자시험독)」의 (此)를 王險城의 代名詞로 보며,
<평양패수고>

요동군 험독의 주(註)도
신찬이
본(本) 험독을 왕검성이라 주장하는 응소에 반대하여
'왕검성은 낙랑군의 속현이요 이 요동군 험독과는 관계없다'는
이의를 제기하였으므로
안사고가 그 이의를 찬성하여
"신찬의 주장이 옳다"라 함이니,
그 전후의 문례(文例)에 의하여 글의 뜻이 더욱 명백하거늘
선배유학자들이 지리지의 '글쓰는 법'을 잘 알지 못하고
또 '험독' 주석의 글 뜻을 잘못 풀어
차자시험독(此自是險瀆)의 차(此)를 왕검성의 대명사로 보며,

瓚(신찬)說을 應(응소)說의 贊成說(찬성설)로 알아
그 全文을
「應劭(응소)가 말하기를
險瀆은 朝鮮王 滿(위만)의 故都 - 王險城이라 하니,
臣瓚(신찬)은 이를 贊成(찬성)하여 말하기를
王險城 - 朝鮮王 滿(위만)의 故都(고도)가
樂浪郡 浿水(낙랑군 패수)의 東에 在하니,
「此」 王險城은 곧 遼東郡의 險瀆(요동군의 험독)이라 하고,
師古(안사고)는 또 臣瓚(신찬)의 贊成說을 贊成하여 가로되
瓚(신찬)說이 是也(시야)라 한 줄로」 解釋(해석)하였으니,
이러한 解釋(해석)은 前後의 文例(문례)에 不合할 뿐더러,
<평양패수고>

신찬이 응소의 주장에 찬성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

그 전문(全文)의 내용에 대해
응소가 가로되
“험독은 조선왕 만의 고도(古都) 왕검성이라”하매,
신찬은 이 주장에 찬성하여 가로되
“왕검성 곧 조선왕 위만의 고도(古都)가
낙랑군 패수의동쪽에 있으니
이 왕검성이 곧 요동군의 험독이라” 하고,
안사고는 또 신찬의 찬성설을 찬성하여 가로되
“신찬의 말이 맞다(찬설이 시야)”라고 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니,
이러한 해석은 전후의 문례(文例)에 맞지 않을뿐더러,

또는
險瀆縣(험독현)이 遼東郡(요동군)의 屬縣(속현)인 同時에
樂浪郡(낙랑군)의 屬縣(속현)도 되며,
遼東郡(요동군)이 곧 樂浪郡인 同時에
樂浪郡이 곧 遼東郡이라」는 瘋人(광인)의 解釋(해석)이 되니,
이는 上下의 文意만 矛盾(모순)이 될 뿐 아니라
곧 同樣·同名·同位置 城邑(동양,동명,동위치 성읍)이
一地에 雙立(쌍립)하고
同時·同地·同事實의 歷史가 一線에 幷行(병행)하여
畢竟(필경) 世人이 摸捉(모착)할 수 없는
非地理(비지리)의 地理, 非歷史(비역사)의 歷史가 됨이 아니냐?
<평양패수고>

摸捉(모착):탐색해서 잡다.

험독현이 요동군의 속현인 동시에 낙랑군의 속현도 되며
'요동군'이 곧 '낙랑군'인 동시에
'낙랑군'이 곧 '요동군'이라는 미치광이의 해석이 되니,
이는 위 아래 글의 뜻만 모순이 될 뿐 아니라

같은 모양, 같은 이름, 같은 위치의 성읍(城邑)이
한 곳에 두 개가 같이 있고
같은 시간, 같은 땅, 같은 사실의 역사가
하나의 선에 두개가 같이 일어나서
필경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수 없는
지리가 아닌(비지리)의 지리,
역사가 아닌(非歷史)의 역사가 됨이 아니냐.

諸 先生의 精博(정박)한 學識(학식)으로
이같은 大錯誤(대착오)가 있음은 정말 喫驚(끽경)할 일이며,
더구나 臣瓚(신찬)의 本意(본의)는
王險城(왕검성)인 平壤(평양)을
遼東郡 以東(요동군이동)의 樂浪郡 平安道에 있다고 主張하는
諸 先生의 意見과 틀림이 없거늘,
諸 先生들은 前述(전술)과 같이
臣瓚(신찬)의 說을 誤解(오해)하였으므로
이를 自家의 平安道 平壤說(평안도 평양설)을 反對(반대)하는
遼東 平壤說(요동평양설)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東史問答(동사문답)·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
海東繹史(해동역사)·地理考(지리고) 等 各書에도
다 平安道 平壤을 主張하는 同時에
臣瓚(신찬)의 說을 「妄爲之(망위지)」라 하였으니,
어찌 天下의 笑話(소화)가 아니냐.
<평양패수고>

喫驚(끽경):몹시 놀람
笑話(소화): 우스운 이야기

여러 선생들의 밝고 넓은 학식으로
이같은 큰 착오가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더구나 '신찬'의 본래 의도는
왕검성인 평양을
요동군의 동쪽인 낙랑군 평안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여러 선생들의 의견과 다름이 없는데,
선생들이 앞에서 말한대로
신찬의 주장을 오해했으므로
그의 주장이 자신들의 '평안도 평양설'에 반대하는
'요동 평양설'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동사문답,아방강역고,해동역사, 지리고 등 여러 책에도
'평안도 평양'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찬의 설을
“망령된 주장을 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천하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냐

책에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글의 구조를 단재가 밝히고 있다.
조선의 학자들중에
'역사'에 제대로된 관심을 가진 학자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정약용조차, 성리학의 프레임에 갇혀서
우리의 상고시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허기야,
현재처럼 쪼개진채 북쪽땅이 차이나의 속국이되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 영토는 원래 이랬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의 학자들이 가진 한계는
우리의 한계와 일치한다.

현재는 다만 정보가 공개되어 있어서
조선이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삼았고
고려는 천리장성 남쪽이었다는 정도

소중한게 무엇인지 모르는 민족이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image.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