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로 부터 시작해서
전쟁을 다룬 소설이나 다큐멘터리는 많다.
그 내용을 곰곰히 따져보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전쟁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역사다.
지리지에 있는 기록은 죽은 역사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의 고대역사에 대해
초등학생 수준의 오해와 왜곡이 진행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전쟁이야기 한토막을 보자.
이 대목은
서기 409년에 馮(풍씨)가 세웠다가 436년에 망한
<北燕북연>이라는 나라의 멸망장면이다.
광개토왕(391~412년)
장수왕(412~491)이니 장수왕 시절이다.
북연을 공경해서 멸망시킨 나라는 '북위北魏'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북위는 북쪽에 있는 나라다.
북위가 남하를 하면서 북연을 위협했고,
멸망을 직감한 풍홍이
고구려에 받아들여줄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수왕이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장수는
갈거葛居, 맹광孟光이었다. 줄여서 거광居光이라 적은 것이다.
후궁이나 중요 인물들을 호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는데 그 길이가 80리 였다는 이야기다.
요수까지 추격했다는 것과
공격은 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당시 북위는 세력이 왕성할 때였는데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 공격하지 않았을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넘어가자.
중요한 지명이 나왔다.
요수遼水다
역사학계에서 말도많고 탈도많은 바로 그 요수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경계가 된다는 요수
여기서 부터 그림을 그려본다.
오른쪽에 짙은 청색선을 대략 요수라고들 한다.
그 오른쪽은 요동이고, 왼쪽은 요서라고 한다.
국사책에 그렇게 나와있다.
그리고 서쪽에 오늘의 기록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산서성 대동분지에 있던 북위(1번)가 남하를 시작해서
그 아래쪽 어딘가에 있던
북연의 수도인 '용성龍城'을 공격한 것이다.
고구려의 지원병 수만명이 인근에 대기하다가
용성에 진입하여 북연의 왕과 백성들을 보호해서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다.
용성으로 추정되는 네모박스에서
오늘날의 요수까지는 직선거리로 900km다.
인류역사상 이런 대 이동이 있었던가?
가능은 할까?
분명히 둘 중 하나는 오해다.
전쟁터가 말이 되는 위치로 오른쪽으로 오던가
요수가 말이되는 위치로 왼쪽으로 가던가
하지 않으면 공상소설이 되어버린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전자를 선택했다.
요수가 왼쪽으로 가면 고구려가 너무 커지고
우리 역사가 너무 위대해지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에나라 역사까지 멋대로 해석해서
우리나라 근처로 꿰 맞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봤을때 더 심각한 점이 있다.
역사가 시간과 공간의 결합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어린애같은 수준의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주에도 남산이 있고
서울에도 남산이 있다.
남산이라는 말은 왕궁이 세워졌을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주에 왕궁이 있다면
그들의 역사에 적혀있는 남산은 경주의 남산이며
한양에 왕궁이 있다면,
그 역사에 나오는 남산은 한양의 남산이다.
그 사이에는 시간적, 공간적 괴리가 있다.
그런데,
한양에 있는 남산의 위치를
모든 역사기록에 꿰 맞추려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조선이 들어섰을때 요동은 지금의 요수의 동쪽이다.
북연이 멸망할 때의 요수는 지금의 요수일 수 없는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다시 비정해야 겠지만,
1천년의 시간과 공간의 괴리라는 것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적용시키고 해석하려는 게으른 학자들이
교과서를 쓰고 학생을 교육시키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고 우려스럽다.
우리 역사를 남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연고대, 나머지 모든 대학의 사학과 학생과 교수들
그들은 왜 치열하게 연구하지 않을까?
대학시절 학부생이나 원생들, 교수들의 수준이란게
뻔하다는것을 알긴 했지만,
그래도 40년이 지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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