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9.

in koreanwarhistory •  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에서는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가 소련의 치밀한 계획하에 개최되었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련은 북한만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완충지역으로 삼기는 어렵다고 보고 한반도 전체를 통제하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기구에 의해 완전하게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이 자유선거를 수용할 것이며 전기를 차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남한에서의 유엔이 실시하는 선거에 반대하기로 했다는 것을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1948년 유엔이 시행하는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한 국가의 대표들이 이런 선거가 한국의 분단을 강화시킬 것이며, 그 이유는 소련이 선거를 북한지역에서 실시할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던 것을 살펴보았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의 몇몇 위원들은 그런 이유로 선거의 실시를 반대했으나, 대부분은 그런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달했다. 이승만은, 남한이 혼란에 빠져 있으면 소련이 이를 차지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이런 관점에 동의했고 미국이 남한에서 단독정부의 수립을 위해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의 다른 정치지도자들은 단독정부를 그리 받아 들이고자 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들여 1949년 4월 19일 평양을 방문하여 어떻게 전체 한국을 대표하는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가했다.

김일성은 왜 이런 회의를 개최했는가 ? 우리는 1948년 김일성이 이런 회의를 시작할 만한 권한을 가지지 못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 문서고 기록들은 후기 스탈린 시대의 정치문화를 지키면서, 소련의 대표기구들이 심지어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대한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소련의 대표기구들은 김일성의 연설, 가두행진의 배치, 북한의 항구에 있는 크레인의 사용과 관련하여 중국과 협조하는 것 등까지를 승인했다. 이런 상황이 1948년 가을 일반 북조선인민공화국이 창설되자 조금 달라졌으나, 그 이시간 이전까지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모스크바의 의도를 확인해야하는 것이다.

공동선언문은 또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했으며, 남한에서 단독정부의 어떠한 일방적인 수립도 거부했다. 소련이 이미 충분한 숫자의 충성스런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식별했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하게 통치를 한국인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한국에 대한 소련의 목표가 한반도를 동쪽에서 소련에 대한 미래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안보 완충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것임을 보아 왔다. 1948년까지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절반은 그런 조건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남한에 한국인구의 2/3가 살고있기 때문에 북한이 적대 세력에 의해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 한반도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일 때까지 소련의 안보는 불안정하게 남아 있었다. 남한에서의 혼란과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미국의 군정에 대한 혐오로 인해, 소련의 대표기구들은 미국의 군대가 철수하면 김일성의 통치기구를 전체 한반도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만일 유엔이 지원하는 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고 정부가 수립되면 남한지역을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이런 남북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이런 선거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주일간의 회의 마지막에 무엇보다 먼저 점령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소련은 이미 북한에 군대의 창설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이 군대는 중국 공산당 군대와 같이 싸웠던 수만명의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귀환하면서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전하게 자신의 군대를 철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의 뒤에 숨어 있는 의도와 북한지도자들의 소련에 대한 충성에 실망했다. 그들은 김일성에게 남한에서 온 방문객들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4월 25일 가두행진에서 한국인들이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를 행진시키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또한 “스탈린 원수와 소련 만세”라고 한국인들이 외치는 것에 대해서노 불만을 표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자유선거를 받아 들일 것이며 전기를 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반대로 두명의 남한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유엔이 시행하는 선거를 보이코트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5월 10일 선거가 다가오자 남한에서 격렬해진 폭력에 대해 살펴보고 선거의 결과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을 참고했다. 서교수는 미국립 문서보관소의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을때 확보한 문서의 콜렉션에서 발견된 연석회의의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을 정리했다. 이 문서는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로 이송되었으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열람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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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관련 만우절 하니 '팔도 비빔밥'탄생 과정이 떠올랐는데...

올해의 4월 1일이 주는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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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던 이야기였네요. 잘읽고갑니다.

당시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 이야기는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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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느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