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 Cubano#30] 기다림이 주는 익숙함

in kr-series •  6 years ago  (edited)

4월 30일 늦은 오후, 큰 무리 없이 코스타리카에 입국했다.

코스타리카, 여기서부터 기록도 없고 기억도 불분명하다. 오로지 미국으로 향하는 통로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방문했던 나라에 대해서 크게 아는 부분이 없다. 대신 며칠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다른 나라를 오가는 덕에 각 국가가 지닌 표면적인 차이가 크게 체감되었다.

내게 코스타리카는 화폐가 아름다운 부자나라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단위 지폐에 원숭이, 고래, 사슴(?) 같은 동물이 그려져 있다. 색상도 노랑, 빨강, 초록, 파랑으로 알록달록 하다.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관광 이외 무슨 산업이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중미에서는 잘 사는 나라에 속한다. 매일 이동하는 버스, 트럭, 오토바이 등으로 교통이 혼잡하긴 했지만, 가장 낙후되었을 게 분명한 국경지대조차 다른 나라에 비하면 숙소 시설도 제법 잘 되어있고 물가도 확연히 비쌌다. 국경지대에 마트도 있고 식당도 많고 작은 상업지구가 분명히 있었다.

코스타리카에서 명확히 알게 된 사실, 중남미는 쿠바 사람이 합법적으로 통과하는 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나뉜다. 즉, 콜롬비아는 그렇지 않은 국가였다면 파나마, 코스타리카 정부는 지나가도 좋다는 공식적인 서류 절차를 밟으면 문제없이 국경을 넘어가도록 허락해주었다. 물론 체류라는 관점에서 콜롬비아, 파나마는 쿠바인이 정착해서 살 수 있도록 특별 비자(?)를 주는 반면 코스타리카는 (내가 알기로)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코스타리카에는 파나마보다 더욱더 많은 쿠바 사람이 머물렀다. 그들은 자신이 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모여들었고 다른 중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코스타리카 공무원의 일 처리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국경지대에 숙소가 아주 많지는 않아서 간신히 헤매다 결국 도움을 받아 쿠바인과 다른 불법 이민자들이 많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았다. (걔 중에 아프리카 사람도 있었고 난 '눔' 생각이 나서 그들과 꽤 친근하게 지냈다)

정확히 언제 떠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매일매일 이민국 사무실에 달려가서 대기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무려 6박 7일간 코스타리카에 머물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국경지대에서 5박 6일을 보냈을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참 지루했다.


국경지대 마트는 처음이었기에 나와 알레는 가끔 그곳에 가서 과일, 요구르트, 빵을 사서 끼니로 때우곤 했다. 알레는 바나나를 절대 먹지 않았다. 바나나를 너무 많이 먹어 지겹다고 했다. 대신 빨간 사과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과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에 사과를 하나 사주니 맛있다고 했다. 그렇게 알레는 1일 1 사과를 먹게 된다.

다이소 같은 생활잡화점이나 백화점 같은 곳을 구경하기도 했다. 알레는 고무공 3개를 사서 저글링을 연습했다. 저글링 공연을 해서 돈을 벌어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고 나는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여행 중에도 웬만큼 맘에 드는 게 아닌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을 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히나 그때는 단 하나의 짐도 늘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장기여행자에게 짐 무게는 욕심에 대한 대가라고나 할까. 그런데 희귀 동물로 유명한 나라라서 그런지 인형 판매대에 각종 동물 인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귀여운 고릴라 인형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잠시 빛나는 눈으로 그 인형을 응시하다가 '안 되겠지 정신 차려.'하고 돌아선다. 알레는 그 인형을 사라고 나를 부추긴다. 그렇게 신나는 마음으로 고릴라 인형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인형이 조금 그를 닮은 것 같다. 특히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귀가 말이다.

-좋아. 앞으로 이 인형은 Mr. 고릴라야. 그런데 Stella, 그 인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마.

알레의 말에 의하면 중남미 사람은 동양인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며 실제보다 더 어리게 보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애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몸매 이야기가 확실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저런 인형을 안고 다니는 날에는 '아주 완벽히 날 잡아가라.'라는 뜻이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유달리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내게 치근덕거리곤 했다. 알레는 중남미 사람 중 동양인에게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꽤 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에게 음흉한 눈빛으로 '네 애인과 잠자리는 어때?'라고 묻는 사람이 이제껏 많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알레는 '그런 이상한 질문 좀 하지 마! Stella도 그냥 평범한 여자야!'라고 화를 냈다. 게다가 성인의 나이지만. 아이 같은 외관을 풍기는 내가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한다며 너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었다.

어쨌든 난 밤마다 그 인형을 안고 자고 짐을 꾸릴 때마다 고릴라와 눈물의 작별인사를 요란스럽게 나누며 가방에 널 압사시켜 미안하다고 사과하곤 했다. 알레는 그 인형을 던져버려야겠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그 고릴라 인형을 제법 좋아했다. 삭막한 여행길 많은 위로가 된 고릴라 인형은 코스타리카 출신이었다.(물론 made in China가 쓰여있어도 놀라진 않겠다)



코스타리카 국경에서 노숙자란 흔하지 않은 존재다. 어느 날 알레는 아주 어린 소년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 아이는 길거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략 13살 정도, 피부가 아주 뽀얗고 마른 아이였는데 귀여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알레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느낌에 그 아이에게 애정을 꽤 쏟았다. 그 아이에게 과일을 주기도 하고 (먹기 싫어서 준 게 아니었나 조금 의심스럽기도 했다) 빵이나 식사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우리가 주는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딘가 모르게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오후, 아이는 선크림을 사고 싶으니 돈을 좀 줄 수 있는지 알레에게 물었다. 알레는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세상에 Stella 들었어? 선크림이 필요하데…. 밥보다 선크림이 필요하데…. 핸드폰 갖고 있을 때부터 의심스러웠어. 먹고살 만한가 보다.
-밥은 굶어도 잠은 길에서 자도 피부는 타고 싶지 않을 수 있지……. 흐음…. 피부가 뽀얗긴 해.

선크림이라…. 나도 알레도 로션도 떨어지진 오래 샤워나 하면 다행인 몰골이었는데 말이다. 그 이후 알레는 그 소년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5월 7일

지루한 순간을 견뎌내니 드디어 코스타리카를 떠나도 좋다는 정부 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보다 먼저 왔던 쿠바 사람 반 정도가 이미 숙소를 떠났다. 아마 산호세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정도 묵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를 오가며 매일 출근하는 직원에게 국경지대가 어디인지 듣게 된다. 아무래도 국경 지대는 여러 곳이 있는데 그분이 말씀해주신 곳은 관광객이 잘 이용하지 않는 지역이었고(론리플래닛에도 그 지점은 없었다), 그분 말에 의하면 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아 그냥 지나가도 큰 무리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밤까지 기다린 후, 국경을 넘기로 했다. 일단 그 주변 숙소에 방을 잡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은밀하게 움직였다. 정말 그냥 산길에 떡하니 코스타리카 이민국이 있었고 능선을 하나 넘으면 니카라과 이민국이 나왔다. 산길 옆 풀이 무성한 샛길을 이용해 알레는 조용히 움직였다.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민국으로 가야 했는데 출국 도장은 받을 수 있었는데 니카라과 이민국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입국 도장 없이 떠날 수는 없었다.

5월 8일

다행히 근처에 슈퍼 같은 곳이 있어 음료수도 팔고 의자도 몇 개 있었다. 그곳에서 아침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니카라과 이민국은 출국 도장을 다시 받아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코스타리카 이민국에서 5월 8일 자 출국 도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니카라과 입국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알기로 니카라과는 쿠바 사람이 통과하도록 허용해주는 정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여나 가는 길에 검문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검문은 없었다. 여정이 지날수록 나의 담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니 이런 여행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일이 생겨도 알레가 쿠바로 되돌려지진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겨서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코스타리카에서 지체한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10시간 넘게 달려 니카라과 국경지대를 향해 논스톱으로 달렸다.

니카라과는 가난한 나라였다. 갑자기 물가가 저렴해졌다. 물도 음식도 버스비도 코스타리카보다 훨씬 저렴했다. 또한 그때부터 일명 '닭장버스' 체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동안 꽤 좋은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닭장 버스'의 승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따로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긴 좌석이 하나로 되어 있고 어른 3~4명이 끼어 같이 앉아야 했다, 마치 꼬마 아이들 기차에 옹기종기 모여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가 있다면 기차놀이를 하기에 다 큰 어른이 승객이라는 것이다. 버스가 흔들릴때마다 엉덩이가 부딪혔다. 버스표도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고 버스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영어를 잘하는 니카라과 청년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무척이나 친절해서 단번에 니카라과 이미지가 좋아져 버렸다. 어쩌면 그런 불편한 버스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검문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단번에 아무 일도 없이 니카라과 국경지대까지 도착했다. 일단 밤이 늦어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그때 긴장감이 다 풀려 그다지 크게 걱정을 안 했다. 출처가 불분명했지만, 온두라스가 쿠바인이 지나가도록 허용해준다는 정보를 언뜻 들었기 때문이다. 다 잘될 거란 마음으로 여행의 피로를 녹이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Mi Cubano 시리즈
[Mi Cubano#1] 첫 만남 -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
[Mi Cubano#2] 예고된 불협화음의 시작
[Mi Cubano#3]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Mi Cubano#4] 사랑하지 않아도 특별한 사람
[Mi Cubano#5] 그렇게 마음이 열리다.
[Mi Cubano#6] 때로는 곤란해도 괜찮다.
[Mi Cubano#7] 트리니나드에서 생긴 일
[Mi Cubano#8] 너는 나의 카르마
[Mi Cubano#9] 아니야...
[Mi Cubano#10] 분명한 선을 가진 연애
[Mi Cubano#11] 비날레스, 자전거 그리고 흉터
[Mi Cubano#12] 시엔푸에고스 불안정한 평화
[Mi Cubano#13] 바라코아에 가야만 했다.
[Mi Cubano#14] 이야기가 있는 바라코아
[Mi Cubano#15] 취중진담
[Mi Cubano#16] 결정적 순간
[Mi Cubano#17] 뜻밖의 로맨스
[Mi Cubano#18] 마리암의 아파트
[Mi Cubano#19] 정해지는 윤곽
[Mi Cubano#20] 마리암과 호세
[Mi Cubano#21] 네가 조단 일리 없어!!
[Mi Cubano#22] 쿠바여- 안녕.
[Mi Cubano#23] 책임감을 짊어진다는 건
[Mi Cubano#24] 잠시 허락된 여행자 모드
[Mi Cubano#25] 처음 겪는 국경의 밤
[Mi Cubano#26] 72시간
[Mi Cubano#27]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Mi Cubano#28] 기다리고 싶지 않다면
[Mi Cubano#29] 쿠바 in Puerta Obali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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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 점점 커지는 스텔라. ^^

아~~ 이젠 미국까지 쉽게 가나 싶었는데... 마지막 한 줄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네요. ㅠㅠ

원래 사람이 안심하고 있을 때 '당해봐라!'하고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글은 막줄을 위해서 쓰여진 걸지도 몰라요 :D

다음 날 벌어질 일,, 대형 떡밥을 하나 투척하셨군요ㅎ 기다려집니다^^

다시 시작된 낚시 생각보다 시시해서 김이 빠질까 두렵기도 해요 ㅋㅋㅋㅋ

ㅎㅎㅎ 정신없이 읽다보니 다 읽었네요 ^

우와 raah님 다 읽어주셨다니 ㅠㅠ 너무 감사드려요!

너무 재미난 이야기 ㅎㅎㅎ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꾸준한 활동을 응원합니다.

북이오(@bukio)는 창작자와 함께 하는 첫번째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첫번째 길드(Guild) 구성을 위한 공지글을 게시하였습니다. 영문 문학작품의 한글 번역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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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온두라스는 통과 못하나요? 궁금궁금
진짜.. 중남미 사람들이랑 여행하다 보면 대한민국 여권이 이렇게 파워풀했나...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