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의 애인

in kr •  6 years ago 

1986년 8월 14일 서진룸살롱의 참극 , 사형수와 그의 애인

서진룸살롱 사건을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허긴 기억 못할 리는 없지. 그때 유행어와 함께 말이다. "교통사고 환자요!" 1986년 8월 14일 밤의 일이었지. 서울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 앞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 4명이 업혀 왔었어. 그런데 환자를 업고 온 보호자(?)들의 행동은 그렇게 얌전하지 못했다. 마치 쌀가마를 부리듯 계단 앞에 내쳐 버리고는 총총 사라져 버린 거지.

의사는 환자들을 보고 대경실색을 했어. 교통사고 환자가 아니었던 거야. 상처가 하복부에 집중되긴 했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채 널부러진 그들은 곧 숨을 거두지. 목포 맘보파 조직원 4명의 최후였어. (예전에 김승연 한화 회장의 보복폭행시 대동했던 조폭이 이 조직 출신이었단다.) 그리고 '교통사고'를 일으킨 이들은 역시 목포가 고향들이었던 서울목포파 조직원들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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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조직대 조직의 혈투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생초보가 관록의 깡패를 잡은 사건이었다고 해. 즉 서울목포파는 정식으로 족보에 오른 조직도 아니었고 유도대학교 (당시 이름) 출신들을 중심으로 몇 명이 어울려서 어깨에 힘 주고 다니는 얼치기들이었지만 이들에게 사정없이 당했던 목포 맘보파 조직원들은 다년간의 싸움으로 단련된 싸움꾼들이었다고.

특히 죽은 사람 중 조원섭이라는 이는 “김두한 이후에 최고”라는 소문까지 달고 다니던 사람이었지만 좁은 룸살롱 방 안에서의 칼질에는 대책이 없었지. 사실 작심한 습격이 아니라 사소한 시비 끝에 일어난 불상사였지. “뭘 봐?” “어쭈 많이 컸네” 뭐 이렇게 시작한 게 경천동지의 대사건이 된다.

온갖 흉기와 야구방망이 앞에서 무슨 공이라도 세운 듯이 고개 빳빳이 들고 태연하게 섰던 ‘서울목포파’의 모습을 기억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뻔뻔스러웠다기보다는 정말로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고 해. 그리고 혹자의 의견에 따르면 개헌 요구다 뭐다 핀치에 몰려 있던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 놓기 위해 뻥튀기한 사건이라고도 하지. 어쨌건 이때 검사의 논고 가운데 한 구절은 두고두고 우리 말의 관용어구로 남는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

그들 가운데 사형 선고를 받은 건 두 명이었어. 김동술과 고금석. 두목은 사형을 면하고 무기형을 받았는데 둘에게 사형이 때려진 이유는 행동 대장으로서 4명의 목숨을 앗아갈만큼 잔인한 칼을 휘두른 이들이었기 때문이지. 둘은 결코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눈물을 흘렸지만 통하지 않을 변명이었다. 한 명당 40회 이상의 칼질을 하기도 했으니...... 용서할 수 없는 범죄. 그런데 그 중 하나인 고금석에게는 특이한 사연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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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금석
.

그의 아버지는 낙도의 교감 선생님이셨어. 또 고금석 자신도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다고 해. 인사성 밝고 예의도 바른. 사형 언도 이후 고향 마을 사람들이 우리 금석이 살려 보자고 구명운동에 나섰을 정도라니까. 하지만 젊음의 객기와 우정으로 치장된 악마의 유혹은 그의 손에 회칼을 들렸고 살인마로 만들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책임이지.

하지만 1989년 8월 만 3년의 수형 생활을 치르고 사형대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수형생활을 한다. 독실한 불자로 살면서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해산한 여자 재소자를 돕기도 하고, 불우한 재소자의 사연을 들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도움을 주었다고 해. 영치금을 모아 강원도 오지의 아이들을 후원했고 아이들이 바다를 구경하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을 돌봐주던 박삼중 스님을 졸라 아이들을 해운대 여행을 시켜 줬다고 해. 박삼중 스님은 바로 그 해운대에서 고금석의 사형 일정 확정 소식을 듣게 되고. 박삼중 스님은 사형대에 오른 고금석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고 하는구나. 오히려 스님을 위로한 건 고금석이었다고. “스님 내가 스님 당뇨를 가져갈 테니 건강하게 사십시오.”

이 고금석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사연이 전해진다. 말했듯 교육자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라났던 고금석에게는 윤상희(가명이다)라는 어릴 적 소꼽친구가 있었어. 그런데 그녀는 면회를 다니면서 고금석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 거야. 연민으로 시작했을 수도 있고 동정이 깊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사랑은 감옥 밖의 어느 연인보다도 더 굳건해진다. “면회를 다닐수록 금석이가 성자로 보여요.” 처음에는 구명을 호소했지만 그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옥중 결혼을 청해.

영화 속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다. 요즘같이 사형이 폐지되다시피 하던 시절도 아니고 툭하면 몇 명 사형 집행했음 뉴스가 신문 귀퉁이에 실리던 시절이야. 더군다나 정권 차원에서 ‘키운’ (?) 서진룸살롱 사건의 주범이면 넥타이 공장행을 면하기 어려웠다고. 하지만 창살 밖의 여자는 그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사형수의 아내이기를 갈망한다. 자신이 믿어온 기독교를 버리고 남자가 독실히 받아들인 불교로 개종하면서까지.

하지만 사형수에게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대. 옥중결혼은 기결수에게나 허용되는 일인데 사형수란 죽을 때까지 형을 받지 않은 미결수 아니였으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사랑을 한 여자의 마지막 소원은 이뤄지지 못하고 둘은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다. 그러자 윤상희는 박삼중에게 이런 말을 해. “스님 비구니가 되겠습니다. 비구니로 살면서 금석이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고금석에게 전해지자 고금석은 다시 한 번 모진 마음을 먹는다. 서진룸살롱에서 보여 준 살기와는 또 다른 단호함으로. “나 때문에 비구니가 된다니 더 이상 그 사람 보지 않겠습니다." 정히 자기를 버리지 못하겠다면 내가 그녀를 버려서라도 슬픈 인연을 끊겠다는 뜻이었지. 그리고 그녀와의 모든 면회를 거부한다.

사랑을 위해 세상을 버리려는 여자와, 차가운 창살 안의 유일한 위로였을 사랑의 온기를 스스로 모질게 끊어 버리는 남자. 그 둘은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기를,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잊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둘은 정성스런 시간들을 보내다가 남자의 죄업이 쌓은 사형대에서 이승의 인연을 끝낸다. 고금석은 영치금 20만원을 자신이 후원하던 강원도 용소분교 아이들에게 남겼고 이 돈은 학교 교실을 증축하는데 쓰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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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석이 후원한 용소분교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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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식을 들었는데 강원도 용소분교는 이제 폐교됐다는구나. 고금석이 세상에 남기고 간 아름다운 뜻 하나는 이제 세월의 더미 속에 묻혀 버린 셈이야. 하지만 그가 두고 간 콩팥과 안구는 아직 누군가의 몸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믿어. 그리고 이승에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랑을 보내야 했던 한 여자의 기억과 마음 속에서도 그는 살아 있겠지.

그녀가 비구니로 살든 아니면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삶을 일구고 있든 그건 관계없어. 어느 쪽이든 고금석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비슷한 기원을 하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테니까.

“꽃이 피었다가 지면 다시 그 열매가 새 생명으로 잉태되듯이 우리의 생명도 육신의 낡은 옷을 버리면 다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못난 자식 이 생에 어머니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내세에 아니 세세생생 꼭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89년 5월,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중에서) 여기서 어머니 대신 윤상희의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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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랫군요...목포파는 신출내기였군요. 그 시대는 정말 조폭들이 판치던 세상이었죠. 정치가들도 어느정도 조폭들과도 함껴 엮여 불법이 판을 치던 세상. 그런면에서 요즘은 많이 나아진것 같아요

조폭과 정치는 ....거의..... 지금은 조폭이 기업화돼서 덜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정말 숨도 안쉬고 잘 읽었어요 이런 사연들이 있다니
정말 눈물나네요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네 모든 사건 사고 속에는 미어지는 사연이 없는 게 드물죠

네 아주 잘 읽었어요

유명했던 사건이었죠. 100% 언론에 나온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어쨌건 죄를 뉘우치고 간 고금석의 명복을 빕니다.

아쉬운 건 고금석이 마지막으로 돕고자 한 학교도 폐교가 됐다는 겁니다..... 물론 어쩔 수 없었겠으나..... 아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