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제가 일하는 상담센터에서 동료 상담자들과의 정기모임이 있었습니다.
원래 자기가 힘들어 하는 내담자 사례 각자 가지고 나와서 어떻게 하면 내담자에게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상담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인데 오늘은 내담자 사례와 관련 없이 각자가 경험하는 어려움이 대해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자리가 되었네요.
저는 이런 식의 모임이 좋습니다. 집단 수퍼비전이나 공개 사례 발표 자리는 아무래도 수퍼바이저라고 하는 권위자가 있다 보니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수퍼바이저 성향과는 무관하게, 어떤 말을 다른 상담자들 앞에서 하고자 하다가도 '내가 이 자리에서 이런 얘기 해도 괜찮을까?' 한 번 더 자체 필터링하게 될 수밖에 없죠. 쭈구리 초보 상담자인지라 더 필터링이 심합니다. 괜히 얘기 꺼냈다가 바보 되는 거 아니야? 생각하기 쉽죠.
동료들과의 모임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의식적 검열이 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상담하다 보면 어떤 내담자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반드시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만큼 상담이 상담자에게 버겁게 느껴진다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혼자만 하게 되면 그 상담은 실패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내담자에 대해 상담자가 충분히 부정적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런 것을 동료들에게 말로 표현함으로써 내담자에게 행동화하게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죠. 말로 표현된 것들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언어화되지 못 한 감정이나 사고가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죠.
저는 내담자가 너무 상담 구조를 안 지키면(ex 많은 당일 취소) 화가 납니다. 토요일 상담에 청소년 내담자가 안 빠지고 꼬박꼬박 오는 게 더 이상한 거죠. 뭔가 내담자의 역동보다 제 역동이 더 깊이 관여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취소가 많으면 limit-setting 다시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종결시키는 게 맞죠. 제 문제인 것을 알면서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이런 화를 표현할 만한 곳이 바로 동료들과의 모임입니다. 얘 때문에 화 난다,라고 몇마다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화는 흘러갑니다. 내담자가 상담 장면에서 고여 있던 부정적 감정들을 잘 흘려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감정을 흘려보낼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다른 상담자들의 피드백으로 길러갑니다. 상담자는 만능해결사가 아니죠. 특히나 사회계층이 낮아 사회복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ex 차비가 없어서 상담소 못 오는 청소년 내담자에게 차비 지원하는 것), 그런 개입을 상담자가 일일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다른 서포터의 도움이 필요하죠.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개입하다 보면 금방 소진됩니다. 때때로 그런 것까지 챙기는 열정적인 상담자가 있긴 하고 저도 그런 분들을 존경하지만, 저는 동료들이 '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더 애쓰려고 하지 마'라고 피드백 줄 때 위안을 얻습니다. 말의 2/3 정도를 알아들을 수 없는 다문화 여성을 상담 중인데, 말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힘든 얘기를 잘 들어주고 내담자가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동료들이 얘기해 줄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이 내담자에 대한 부담이 줄어드는 경험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이전 직장에서 1년 동안 같이 일했던 동료를 만났습니다. 한 분은 아동을 대상으로 놀이치료와 집단치료를 하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상담자입니다. 갓 전문가 취득했을 때까지만 해도 심리치료하면 진짜 좋아지는 거 맞아? 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리치료에 대한 의심이 많았습니다. 병원에서 심리평가 기계가 돼 평가만 하다 보니 심리치료하는 것을 주변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담을 10명 정도 하긴 했지만 대학생 내담자들이었고 대체로 방학 전에 종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확 좋아졌다고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심리치료하면 좋아진다는 것을 보여준 두 분이기에 참 개인적으로 남다른 애정이 있습니다. 아동 심리치료라고 하는 전투적인 장면에서 맨날 같이 야근하면서 라면도 끓여먹던 사이라 각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이죠. 그래서 이번 모임까지 퇴사 후 세 번이나 모였습니다. 이번 모임은 제가 주도했는데, 전 직장 기관장 뒷담화부터 성격장애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다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이 팀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인지 팀장에 대한 뒷담화를 많이 했는데, 그 팀장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도 알고 듣는 사람도 알지만 표면적인 내용에 집중하여 맞장구쳐 줍니다. 와.. 진짜 어이없네. &%$네.. 이런 것도 일종의 투사적 동일시죠. 역동일시인가? 아무튼.. ㅎ 공감입니다. 힘든 거 말하고 잘 들어주는 사람 있으면 스트레스 해소되죠.
자기와 잘 맞는 수퍼바이저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동료들과의 연결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유능한 상담자로(그런 게 있다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 이네들을 보면 안심이 됩니다. 고마운 인연입니다.
So good and neat,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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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직장동료들과의 잡담으로 회사를 버티는데 상담사분들도 마찬가지시군요 :D ㅋㅋㅋ 공감과 수다의 힘이 정말 중요합니다!
당일 취소는 너무하네요 ㅠ 저라도 화가날것같은걸요. 말하는 것만으로도 화를 흘려보내실수 있다니~ 대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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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dive14님 주 1회 독서 후 서평쓰기 챌린지 #14 잊지 마시라고 1/3만큼 미리 보팅하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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