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이란 건 나쁜 말인 줄 알았어. 자포자기의 다른 말일 거라고. 그런데 희망에 찬 체념이란 것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지. 어떤 화백의 이야기에서. 그분이 그러더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고는 '체념'하게 되었다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그 화백의 불같은 의지는 대신 화폭에 담겼지. 골방에 자신을 유폐시키고 끝없이 반복되는 선 긋기와 붓질로 그 '화'와, '한'을 쏟아내었다지. 그게 한국의 'Dansaekhwa'가 되었대.
'체념滯念'에는 희망이 있어. '념'을 놓았을 뿐이지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념'은 무언가로 승화되었지. '체념'이란 '념'에 몸을 만들어 주는 일일 테니, 캔버스에 담기거나 책으로 묶이거나 물질로 변화한 '념'이 세상을 바꾸는 건 당연한 결과야. 그러므로 우리는 그 '념'이 어떻게 세상에 자신의 몸을 드러낼지 알 수가 없어. 다만 쏟아낼 뿐.
그러나 포기에는 희망이 없어.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는 걸 테니. 단념, 자포자기는 체념과 같은 말이 아니야. 체념은 자기를 변용시키는 것이지 잃는 것이 아니니까.
어제 안타까운 죽음을 들었어. 그는 7년을 매일 15시간씩 배달을 했다지. 달인의 경지에 오른 그는 월 1200만 원을 벌었대. 그리고 신호를 위반한 버스에 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 신호를 위반한 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무리하게 오토바이를 몰던 그가 아니야. 그랬다면 그는 7년을 해올 수 없었을 거야. 그렇다고 자신의 일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았다 한들, 그날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거야. 그의 성실과 노력에도 상관없이 그날 그 자리, 그 순간에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의 삶의 종말이 된 거야.
7년을 매일 15시간씩 글을 쓸 수 있을까? 월 1200만 원의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도? 그리고 정해진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운명의 종말과 마주칠 때 나는 행복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나의 '념'은 몸을 얻게 되었겠지. '체념'한 나는 쏟아내었을 테니까. 지구가 뜨거운 '화'를 대기에 쏟아내듯, 나의 '념'도 활자로 자신을 드러내었을 거야. 그렇다면 그때의 여름밤은..
그날 그 자리, 그 순간에 머물기 위해 '체념'이 필요할 때가 있어. '념'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드러낼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는 그저 품어내고 쏟아낼 뿐이지. 때와 장소는 운명의 몫이잖니. 그러니 우리는 그저 무더운 하루를 살고 선선한 바람이 어루만져주는 여름밤을 느끼는 거야.
또 한 번의 여름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