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주말을 맞아 간단한 상식을 하나 짚고 넘어간다.
'예禮'하면 떠오르는 것이 '공자'다.
예의 화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공자인데.
공자가 말하는 예라는 것이 사실은 정치판에서 내세우는
소위 '금기'같은 것이다.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魯文公 十二年, 丙午 B.C. 615
노나라 문공12년 (BC615)
누군가 도망을 쳐서 노나라로 왔는데
사건을 공자가 그의 역작으로 알려진 <춘추>에기록했다.
'백伯'은 우두머리, 곧 '왕'을 뜻한다.
그럼, 왕이 도망을 쳐서 노나라로 온것인가?
관련 기록을 보자.
十二年,春,郕伯卒.
12년 봄에 성백郕伯이 卒하였다.
봄에 성백이 죽었는데, 성백이 노나라로 도망쳐왔다?
기록의 오류인가? 귀신 이야기인가?
내막은 아래와 같다.
郕人立君,大子以夫鍾與郕邽來奔.
郕人이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니,
太子가 부종夫鐘과 성규郕邽(성나라 읍)를 가지고 魯나라로 도망해 왔다.
여기서 태자는 朱儒(주유)라는 인물인데,
어떤 연유로 인해 자기혼자 성밖에 나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아버지인 왕이 죽었고,
다른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중요한 물건과 영토를 가지고 도망친 것이다.
그걸, 노나라 文公(문공)이 제후諸侯의 禮(예)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가 전부인것처럼 내세우고 기록했지만,
제후도 아닌 도망자를 '성백郕伯'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물론, 기록한 사람은 공자다.
춘추(經)에는 <十有二年,春,王正月,郕伯來奔>라고 되어있다.
관련 기사에 대한 해설을 보면
經(경)에 “郕伯이 도망해 왔다.”고만 기록하고
가지고 온 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를 제후로 존대한 것이다.
이미 그를 제후로 존대하였기 때문에
다시 邑을 훔쳐 가지고 온 罪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예의 본질이고(임금의 수치나 잘못은 감춘다)
춘추에 기록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춘추나 그 행태를 답습한 역사책들을 읽을때
정신차려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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