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4(월)역사단편77-평양패수고(9) 낙랑과 평양1

in hive-143843 •  3 months ago 

평양-패수고를 계속 읽어본다.
단어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본문은 <독립기념관 제공>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평양패수고'역시 당시의 한글이 현재와 다르다.
때문에 현대어로 옮긴 '본문'을 참고로 하는데
간혹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원문이미지를 확인하는 수고를 해야한다.

그리고,
단재의 저작에 대해서도,
여기저기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그 의도는 모르겠다.

이전 포스팅의 주제는

樂浪國(낙랑국)과 樂浪郡(낙랑군)의 구별

이었고 이제

乙. 樂浪과 平壤의 區別:낙랑과 평양의 구별

에 대한 주제를 읽어본다.

낙랑과평양구별.JPG

樂浪과 平壤이 다 「펴라」의 假字(가자)이다.
그러나 樂浪國 滅亡(낙랑국멸망)한 뒤에는
樂浪(낙랑)이라 쓰지 않고 平壤(평양)이라 써서,
遼東(요동)의 樂浪郡(낙랑군)과 區別한 故로
大武神王(대무신왕) 以後 『三國史記』에 쓰인 「樂浪(낙랑)」
곧 新羅本紀 基臨 三年(신라본기기림3년)의 「樂浪」이
今平壤(금평양)을 가리킨 것인 以外에는,
其餘(기여)는 모두 遼東(요동)의 漢 樂浪郡을 가리킨 것이요,
「平壤」은 모두 今平壤을 가리킨 것이니,
<출처: 평양패수고>

假字(가자): 음을 빌린 글자(=이두)
其餘(기여): 그 나머지, 그 이외

그러나, 낙랑국이 멸망한 후에는
‘낙랑’이라 쓰지 않고 ‘평양’이라 써서
요동에 있던 낙랑군과 구별을 했으므로
대무신왕 이후 삼국사기 기록된 ‘낙랑’
곧 신라본기 기림3년의 ‘낙랑’이
현재의 평양을 가리키는 것 외에는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요동의 한나라 낙랑군’을 가리킨 것이요.
‘평양’은 모두 현재의 평양을 가리킨 것이니,

이를테면
(一) 東川王 二十年(동천왕20년)의
「魏軍擾亂遂自樂浪而退(위군요란수자낙랑이퇴)」라 한 樂浪은
遼東(요동)의 樂浪(낙랑)이요 今平壤(금평양)이 아니다.
이 때 魏軍(위군)이 丸都(환도)를 破(파)하고
東川王을 追(추)하다가 敗退(패퇴)함인즉,
만일 今平壤(금평양)의 樂浪(낙랑)이라 하면
이는 軍을 進(추)함이요, 退(퇴)함이 아니며,
<출처: 평양패수고>

擾(요): 침략하다, 시끄럽다
擾亂(요란): 시끄럽고 어지럽다.
遂(수): 마침내
破(파): 부수다
敗退(패퇴): 싸움에 패(敗)하여 물러남.
進(추): 나아가다

이를테면
(一)동천왕 20년의
"위나라 군대가 어수선해 지더니 마침내 스스로 낙랑에서 물러났다.”
라고 했을 때의 낙랑은
'요동'에 있는 낙랑이요,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이 때 魏軍(위군)이 丸都(환도)를 부수고
동천왕을 추격하다가 패배해서 물러나는 것인즉,
만일 현재의 평양에 있던 ‘낙랑’이라 하면
이는 軍을 전진시키는 것이요, 물러나는 것이 아니며,

먼저, 당대의 사건을 살펴보자.
동천왕 16년에 서안평을 공격해서 파괴한다.
조조의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온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승리했지만
다음에 연패하면서 후퇴한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평양낙랑이라면.JPG

지도에 보이는 것 처럼
당시 수도였던 환도는 압록강 너머에 있었다.
환도를 부수고 동천왕을 추격하다가 패해서 낙랑에서 물러났다는 기록인데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면,
"軍을 전진시키는 것이요, 물러나는 것이 아니며"라는 해설이다.

自樂浪而退(자낙랑이퇴)

글자 다섯개에 불과하지만,
여기엔 조금 복잡한 사연이 있다.

신채호선생이 이 문장을 한글로 해석해줬다면 간단했을텐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아마도,
본인은 쉽게 해석을 했을 것이고,
이것이 문제될일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거 같다.

'自와 而' 때문이다.

自를 '스스로'라고 해석하면
'而'가 ~으로, ~으로써 로 해석이 되어

"낙랑으로 후퇴했다" 가 되고

自를 '~에서'라고 해석하면

"낙랑에서 후퇴했다" 가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재가 평양에 있었다고 말하는 '낙랑국'이 멸망한 것은
대무신왕때인 37년 경이다.
오늘 다루는 기사의 내용은 동천왕때로
낙랑국이 멸망한 200년 뒤의 일이다.

위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역습으로 군대를 이동시킬때
낙랑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리고 '져서 물러났다'는 내용이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면,
"軍을 전진시키는 것"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自樂浪而退(자낙랑이퇴)" 문장의 해석은
<낙랑으로> 로 가 맞다.

기사의 '낙랑'이 평양에 있다면, 환도보다 내륙이므로
내륙으로 군을 이동시키는 것은 '전진'이기 때문이다.
낙랑이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어야 후퇴가 된다.

<낙랑에서> 로 해석한다면,
당시에 동천왕이 어디에 있다가 반격한 것인지가
문제시 될 수 있는데,
기록을 보면, 당시에 왕이 도망한곳이
'압록원(鴨淥原)'이라고 되어있다.

고대 압록강이 어느것을 말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의 압록강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원천은 백두산이된다.
기록에 위나라 원정군은 1만명이고
[20년, 가을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관구검파견, 1만명]
최초 전투에서 3천명이 죽었으니
남은 병력은 7천명.

동천왕이 백두산방면으로 철수했다면,
위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반격을 받았을때
'지금의 평양'으로 철수했다는
심지어
'지금의 평양에서 철수'라고 해석해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문구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7천명의 병력이 백두산방면으로 동천왕을 추격했다가
의문의 일격을 당해 철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뜬금없이 '낙랑'이 등장한 것도 이상한데
검모잠이 처음에 '현도'에서 출발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요동지역에 있었던 '낙랑으로'
또는
'요동의 낙랑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는게 상식이다.

해당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때
중국의 사서에 적힌 내용을 옮긴 것이다.

<삼국지/위서/권28/관구검)
정시조방( 240-248) 중 관구검은 고구려가 수차례 침반하였으므로
제군의 보병과 기병1만 명을 지휘해
현도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삼국지에는 승리한 기록만 있고,
물러난 부분에 대한 내용은 없다.
단재가 지적하는 지나인들의
'병적인 자존감+춘추필법'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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