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차원의 접근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를 정리한 글입니다. 유엔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선거를 명목상으로 내세웠으나, 유엔 회원국들은 실제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이런 구상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 카나다라고 하는 점이 의외인 듯 합니다. 역사는 너무나 복잡한 과정의 연속인 듯 합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안보문제에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이글의 처음부터, 우리는 한반도를 분단한 두 점령국가들이 반도에 대해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보아 왔다. 모스크바의 목적을 매우 간단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부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우호적인’ 한국정부가 관할하는 안보 완충지역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물론 이 완충지역이 전체 반도라면 최상일 것이지만, 그들이 한국의 북쪽 절반만이라도 통제할 수 있다면 나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엔이 1947년 말 한국정부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모스크바는 단순히, 북쪽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떠한 외부의 갱비도 차단하면서 북한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보다 복잡했다. 목적은 안보였으나, 국경선을 보호한다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에,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집단안보의 효과적인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더 큰 노력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극단적 민족주의는 파멸적인 세계전쟁을 초래했으며, 비효율적인 국제연합은 이를 방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 유엔의 기초를 놓았을 때, 그는 해방된 국가를 위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 중국과 협조하여 한국에서 새로운 전쟁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1947년 가을까지, 모스크바와 양자협조가 실패하게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으로 넘겼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북한에 대한 통제를 확고하게 장악하고자하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많은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전체의 선거를 선언하는 것이 유엔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선거가 남한에서만 이루어지게 되면, 이것은 비합법적이며 이는 한국의 영구분단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팔레스타인 정부와 카슈미르 및 유럽의 여러 쟁점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유엔의 능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긴밀한 미국의 동맹국을 포함한 많은 유엔 회원국들은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수립된 한국에 대한 유엔 임시 위원회( UNTCOK)에 참가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1947년 12월 카나다의 수상 맥캔지 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이 절대로 협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UNTCOK의 임무는 “바보 같은 일”이라고 하면서, 한국문제에 절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단호하게 밀고 나갔으며, 이는 그가 동맹의 통합이 미국의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미국무차관 로버트 로베트(Robert Lovett)에게 카나다의 보이코트가 유엔의 전체 프로그램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킹 수상에게 대답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소련의 이익만을 증진시키고 반면에 한국의 독립 실현을 방해하는 거이라는 것이었다. 이문제에 더하여, 그는 미국과 카나다는 적국들이 이러한 불일치를 이용하여 양국의 안보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킹 수상은 미국의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으며, 외무장관 레스터 피어슨(Lester Pearson)을 워싱턴으로 보내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피어슨은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카나다는 영국처럼, 혼잡하고 폭력적인 한국상황에 개입하는 것이 유엔 안보리의 필수적인 협조들을 약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나다는 또한 미국이 북한을 유엔의 토의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반대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1848년 1월 5일 트루먼은 킹 수상에게, 국제적 개입은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며, 카나다의 보이코트는 다른 나라에게 유엔의 능력을 의문으로 이끌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시 유엔 결의안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의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트루만과 킹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였는가와 1948년 1월 한국에 UNTCOK가 도착했을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알아보겠다.
이 포스트는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celent work sir.
a very extraordinary your post sir,i support @wisdomand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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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냉전 체제의 격화로 인해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력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아픈 과거를 통해 몸소 배운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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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베네수엘라가 재선거가 쟁점으로 떠오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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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강대국의 의지에 좌지우지 되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앞서 언급하신대로 잠시라도 보안에 소홀함이 없어야할듯 싶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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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킹이 적극 도왔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그래도 소련은 변함없었을 것 같아요.
김일성도 야망이 과한 사람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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