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51

in koreanwarhistory •  6 years ago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에서는 1948년에 논의된 미군의 철수문제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미국무부는 미군의 철수에 주저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미국 전쟁성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 포스트는 결국 미군의 철수는 미국내 여론과 예산,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정리하고 있다.

1948년 1월 UN이 한국문제를 떠안자 마자,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미국의 여론과, 또한 의회가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들었던 대규모 군대에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긴박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 새로운 책임을 부과했으며, 그것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국부무-육군-해군-공군 협조위원회의 극동 하부위원회는 1948년 1월 미국은 선거가 열리기 전에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것임을 보고하고 그 이유는 철군이 법과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고 유엔으로 하여금 미국의 선의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워싱턴은 미국의 개입이 남한에서의 공정한 선거를 보장한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 미국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선거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북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부위워회는 미국이 남한에 강력한 경비대를 창설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획을 수행할 것을 건의했다.

비록 미국무부와 전쟁성이 상기한 건의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에 대한 정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렸다. 국무부 극동부서장 왈튼 버터워스는 미국은 한국에 대한 도덕적 약속을 가지고 있으며 “허둥지둥 도망”하는 것 같은 제안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무부는 군대 철수 날짜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으며, 이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유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육군부장관 윌리엄 드라퍼는 미국은 한국을 영원히 점령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948년 2월 합동참모본부는 의회가 90억달러를 추가로 승인하지 않으면, 미국이 책임진 첫번째 지역인 유럽에서의 소련 공격을 차단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트루만 대통령은 미국은 모든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없으며 경제력도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다. 결론적으로 국방예산의 제한으로 인해, 미국은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서의 철수를 해야했다. 합동참모부가 한국에서 군대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1948년 말전에 철수를 준비할 것을 승인했다.

3월 25일 트루먼 대통령은 새로이 창설된 국가안보위원회( NCS)가 작성한 한국에 관한 정책문서 NSC-8을 받았다. NSC-8은 한국에서 미국의 지역은 경제적으로 약하며 북한에 있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는 경쟁자들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 미국이 남한을 공산주의자의 지배로 넘긴다면 이는 소련의 위협이 일본과 중국으로 확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NSC-8은 미국이 1949회계년도에 1억 8천 5백만 달러를 남한에 경제지원을 제공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남한은, 미국의 생각에 따르면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전복으로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이나 다른 군대의 명백한 침략에 대응”할 수 있도록 자위능력이 있는 소규모 경비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NSC-8은 점령부대는 1948년 말까지 철수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미국은 “한국에서의 어떤 파당이나 한국의 어떤 다른 세력에 의해 취해진 행동이 미국에게 선전포고로 여겨질 수 있는 한국의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일 NSC-8을 승인했으며, 이러한 조치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간의 길이 되기를 희망했다. 미국은 새로운 정부의 초기 몇달동안 경비대를 창설하고 새로운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한국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고자 했다. 동시에, 미국은 소련이 남한에 대한 군사적 침공보다 침투나 전복과 같은 방법을 ㅎ사용할 것이라고 믿었고 미국은 도처에서 공약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워싱턴은 명백한 군사적 침략에 대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었다.

다음 포스트에서, 우리는 이런 정책의 시행을 살펴보고 남한에서의 경제적 도전과 경비대의 창설에 대해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트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로 했다.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of Kansas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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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을 배우는 느낌입니다.

어찌되었건 힘없는 우리나라에 미국군의 주둔은 정세안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비록 그들도 그들의 목적이 있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