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는 전쟁이 끝난이후에 스스로 작성한다. 그래서 전사기록을 보고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신령전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령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에 속한다. 그런데 그 기록이 분명하지가 않다. 군에서 발간한 전사책을 보면 어떻게 싸웠다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이 아닌지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전투를 치른 지휘관이 직접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 전사책을 읽어서 도대체 어떻게 전투가 진행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필자 생각에는 전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요구하는 바를 다 반영하다 보니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기록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기록을 보다보면 그런 혼란함속에서도 서로 부합하는 이야기구조를 찾아 낼 수 있는 법이다.
신령전투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대용장군은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조림산에서 제19연대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해 전선이 뚫렸고 그래서 화산까지 북한군 8사단이 진출했고 이를 막기 위해 7연대 1대대가 화산으로 공격했다고 기술했다.
이대용 장군은 8월 27일 제7연대 1대대가 화산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9월 4일 화산에서 전투가 끝났으며 , 9월 7일 진지를 교대하고 후방으로 나왔으며 9월 16일 부터 반격작전을 시작했다고 이야기 했다.
신령전투전적비의 기록은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의 전투를 신령전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1950년 8월 30일 적 제8사단은 기갑사단 지원 밑에 우리 제6사단은 방어선인 조림산과 화산일대에 침투하여 당시 나흘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적은 다시 병력의 보충과 전차 40대의 증원을 받았다. 9월 6일 우리 제6사단의 전면을 공격해왔고 적 제1사단은 동촌 비행장을 분쇄할 목적으로 강력한 침공을 거듭하여 왔으나 아군은 용전혈투 끝에 이를 격퇴했다. 대구 점령을 목적으로 강군하던 적 제1사단은 우리 제6사단의 필사적인 방어전과 국군과 연합군의 활약으로 9월 15일 완전격퇴하였다. 이 용용무쌍한 혈투사를 길이 후세에
빛내고자 이 작은 돌을 세우노라
이 기록을 보면 당시 제6사단이 신령전투라고 칭한 것은 북한군 제8사단이 조림산과 화산일대에 대한 공격과
북한군 제1사단의 동촌비행장 방향으로의 공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전적비는 1958년 10월 28일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이후 신령전투의 범위는 더 확대되었다. 우선 1982년 발간된 청성전사는 신령전투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번째가 신령부근 전투(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이고 두번째가 신령,조림 반격전(50년 9월 15일부터 9월 22일까지)로 정리했다. 즉 전적비에서 언급한 신령전투는 첫번째 단계인 8월 30일부터 9월 15일 까지인 것이다.
한동안 신령대첩이라고 까지 불리던 작전의 의미가 이렇게 희석된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확인해보아야 한다.
전투가 끝나면 통상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은 말이 별로 없고 별로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후의 논공행상에 더 열심인 경우가 많다. 그런 평가중에서도 당시 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이 언급한 내용은 관심을 끌만하다.
청성전사(1982) 361쪽에서 김종오 장군은 신령부근 전투에서 잘 싸운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신령지구 전투에서는 적전차 8대를 파괴한 변규영 소위와 대대장 김종기 중령(7연대 1대대)과 김용배 중령(제19연대 1대대장), 그리고 2연대 대대장 이운산 소령이 특히 전투를 잘하였다.
라고 증언을 했다. 그러나 청성전사는 김용배 중령의 소속을 잘못 기록했다. 제19연대 1대대장이 아니라 제7연대 1대대장이었다. 그리고 대대장 김종기 중령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청성전사에 당시 제19연대 1대대장은 허용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차를 파괴했다는 변규영 소위도 제19연대 1대대 소속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신령전투중 화산지역에 적 제8사단의 주공이 지향되었다고 기록했다.
반면에 위천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와해되자,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하는 선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9월초 인접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한 후 영천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화산 일대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함으로써, 적의 총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제6사단은 즉시 방어진지 전방으로 반격해 전과확대에 돌입하였다. 적 제8사단은 이후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현 전선만을 유지하고 야간에 중대규모 수준의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대용 장군이 수행한 화산전투는 신령전투에서 적 제8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전사책에서 김용배 중령과 이대용 대위가 수행한 화산전투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DCLICK HTML 삽입형 광고] - 운영중인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이용해 수익을 얻으세요!
안녕하세요. DCLICK 입니다. 오늘은 새로 출시된 기능인 HTML 삽입형 광고에 대해서 소...
편안한 밤되세요^^
오늘도 디클릭!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공을 세우신 분들이 제대로된 처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개 병사는 두 말할 나위도 없구요... 아쉽네요.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희생하신분들중 알려지지 않은분들이 많으신것같더군요.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