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7

in wisdomandjustice •  6 years ago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트루만.jpg

이번 포스팅은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절차를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후 추진하는 과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분단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는 순간 한국의 분단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947년 여름 한국문제가 대두되자, 북쪽의 권력기관들은 남한에서의 독자정부 수립이 한국의 공산주의자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도 해롭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양측은 자연스럽게 북한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임시정부를 원하게 되었으며, 이는 반도의 다른 쪽으로 관할권을 넓혀갈 수 있는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의 토의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남부지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은 소련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정치적 전복을 통해 남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를 기대했다.

학자들은 아직 이기간 동안 남한에서의 스파이 활동이나 교란을 위한 소련의 지원에 관한 완전한 자료들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나, 1947년 8월 미국이 미소공동위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이동할때 이러한 ‘행동 방책’들이 증가했다는 것을 보유주는 증거들은 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한 대응으로, 하지 장군은 경찰에게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문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좌파들의 신문을 폐간했으며, “예의가 공산중의자들과 러시아인에게의해 약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간을 끝났다”라고 선포했다.

동시에, 미국관리들은 이전 포스트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정치적 해결을 위한 계획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슈티코프 장군에게 소련이 공동문서의 작성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경우,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상황에 대한 초안을 작성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8월 23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이러한 움직임을 중지시키거나 최소한 지연시키기 위해, 공동보고서에 대한 미국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미소공동위의 참가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과거의 입장을 되풀이하여 반탁위원회에 참가한 한국의 정당들은 그들이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반대를 번복하지 않으면 미소공위에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몰로토프는 또한 하지 장군의 좌파들에 대한 최근의 체포와 구금을 “비정상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미소공동위 미국대표단장 브라운 소장(Albert E. Brown)은 슈티코프 장군을 모든 합법적인 정치단체의 참가에 대한 모스크바의 거부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한 잘못된 이슈를 확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련의 위선을 벗기기 위해서, 브라운 장군은 소련이 북한에 있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미소 공동위의 광범위한 참가에 동의한다면 수감되어 있는 좌파들을 석방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3일 이후 국무부 차관 로베트(Robert A. Lovett)는 몰로토프에게 소련이 마샬 국무장관과 맺었던 협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는 서신을 썼다. 반탁위원회에 참가한 한국인들은 제시된 협조 약속 문서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여 선동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 했으나, 소련의 대표들은 그들이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거부했다. 미소공위의 지속적인 토의가 무용해지자, 로베트 차관은 (중국과 영국이 포함된) 4개국 위원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9월 9일 워싱턴에서 최의를 개최하여 정치적 해결의 진전에 대한 공동보고서를 작성하자고 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통일과 경제적 회복에 관한 계획을 제안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9월 4일 미국무부는 몰로토프의 답신을 받았으며 그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 외무장관은 미국이 한국에서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을 봉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영국과 중국의 신탁통치 참여는 모스크바가 3:1로 불리하기 때문에, 몰로토프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몰로토프의 서한에 마샬 국무장관이 9월 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의제에 상정하는 연설을 할 것을 지시했다.

많은 학자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결정을 원치않는 부담을 제거하려 한 것이라고 비난해왔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실제 미국의 이유에 대해 이것이 국제적인 상황에 대한 광범위한 우려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본인의 논문 “Making Foreign Policy Under Stalin: The Case of Korea,” in Niels Erik Rosenfeldt, Bent Jensen and Erik Kulavig, eds., Mechanisms of Power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0)과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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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very incredible history sir,i love the story of history sir @wisdomandjustice

I once watched a movie "ayla the daughter of war" this film about the Korean war story with a child whose father and mother were killed, and he was cared for by the Turkish army, this what is a real story ...? when I watched the film I was very moved ...

제가 근대사가 약해서 처음 볼때는 어려웠는데 포스팅해주시는거 계속 보다보니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줄 정도로 상식이 쌓이는겋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