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팅의 내용은 미국이 한국문제를 다루는 과정을 통해 전세계에 자신이 세계의 초강대국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미국은 한국에 경제적 원조를 통해서 소련의 팽창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시도가 미국 상원의 공화당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미 국내정치적 구도에 의해서 좌우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식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의 과정이 알고보면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1947년 봄 미군은 소련과 한국에서의 이념전에 패배하면 미국의 우위가 손상당할 수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을 살펴보았다. 합동참모부는 이에 더하여 한국의 미래 정부에 대한 이런한 투쟁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미국이 세계적 리더십의 책무와 의무를 받아들이려고 결정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확인시켜줄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국가안보에 우선적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서유럽의 제국가들을 강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해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는 미국이 한국에서 새로운 정부의 수립에 대한 노선을 유지하여 한반도에 그 다음해에 분단국가의 수립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워싱턴을 1950년 소련이 지원하는 북한의 침략에 개입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914년 이전까지 미국의 경제적 잠재력은 아직 가장 강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경제력은 미국으로 이전되었으며 이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새로이 확장되고 있는 미국 산업으로 부터 막대한 생필품을 매입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정치인들은 자연스럽게 세계의 강대국 중에서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토의했다. 공화당 지도자들은 미국은 유럽국가들이 이미 보유화고 있는 제도인 중앙은행과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주장했다. 민주당 대통령 우드루 윌슨은 반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투쟁에 합류하기 보다는 미국은 새로운 힘을 평화를 유지하기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슨의 노력은, 1920년대와 30년대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발호하고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인해 극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과 일본 제국주의 국가의 부와 힘을 파괴했을때, 유럽의 양끝에 있던 소련과 미국이 세계의 유일 강대국으로 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파멸적인 시간이 지난이후, 미국의 지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제무대에서 그들이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정치적 격변의 초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향후 소련의 침략 억제에 대한 그들의 성공과 실패가 세계인들이 미국이 그들의 “책임과 의무”를 받아 들인다는 것을 세계인들이 확신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47년 6월 3일 예산국장 대리 프래데릭 로톤이 한국에 2억 1500만 달러의 원조계획을 승인했던 것이다. 미소공동위의 소련 대표는 자신의 지역이 미국이 점령한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양호하다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말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모스크바가 북한에 완충지대를 수립하려고 결정한 것을 보는데 실패한 로톤은 남한에서의 경제적 개선이 “ 2개의 지역 재통일에 대한 소련의 거부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잘못 믿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계산도 있었다. 미국의 자원들이 많지만 무제한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유라시아의 상당부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미국 지도자들은 가능한한 효과적인 경제 지원을 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그들은 남한에 대한 원조가 자족적으로 만들어 미국의 자원에 대한 부담을 줄여줄 것이라고 계산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은 효과적인 경제지원을 통해, 한국에서 소련의 팽창을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원조를 보내겠다는 행정부의 계획은 상원의 공화당 지도자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이들은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정부의 지출확대에 대한 일반적인 우려로 인해 어떠한 새로운 대외지원도 차단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동시에 이승만과 김구는 신탁통치에 대해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시위를 조직했으며, 시위 참가자들은 소련 대표단에게 돌과 오물을 던지기도 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하지 장군이 이승만과 김구의 공세에 대응했으며 어떻게 미소공위가 불가피한 실패를 향해 갔는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 했다.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Viking Press, 2006)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만약 미국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미래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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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분단 이유를 읽을때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국력이 없어 강대국의 이해에 좌지우지 되는게 얼마나 슬픈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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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is really incredible sir,i like it your works sir@wisdomand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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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련에 의해 통일정부가 세워지는거보다는 미국의 개입으로 분단된게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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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역사는 참 흥미롭습니다.
반복되면서 계속 진행되니까요.
다음편 기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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