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1.04.17 토

in kr-diary •  3 years ago  (edited)

금요일 저녁, 일과를 일찍 마치고 잔디를 깎았다. 보통 잔디는 날씨에 따라 주말 오후에 깎는데, 이번에는 일요일에 약을 뿌려야 하므로 금요일에는 깎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잘린 잎들을 모아서 버려야 한다고.

저가형인 우리집 잔디깎는 기계는 풀이 너무 길게 자랐거나 수분을 많이 흡수하고 있으면 종종 뒤의 통에 담기기 전에 관이 막혀버린다. 그러면 기계를 멈추고 관에 막힌 풀 조각들을 빼내야 한다. 이 기계를 이용한 지 어언 10년이니 감으로 이동 속도를 조절해서 최대한 안막히게 노력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꽉 찬 통의 풀잎들을 버리라 왔다 갔다... 그냥 옆으로 뿌려버리면 1시간 약간 넘으면 될 일을, 그래서 결국 3시간 가까이 걸려버렸다.

이렇게 일이 길어질 줄 모르고 5시에 나올 때 과자 몇 조각이랑 바나나 하나 먹고 왔는데, 중간에 배고픔의 파도가 밀려 왔다가 살짝 빠져나갈 때 즈음에 일이 끝났다. 지친 몸과 짜증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는데, 가족들은 평안한 저녁을 보내고 있고, 부엌은 불이 꺼져있다. 얼른 씻고 좀 먹어야겠다.

평소보다 샤워를 좀 빨리 끝내고 부엌으로 왔다. 그는 나를 보며 갑자기 일어나 뭘 먹겠냐고, 그래서 그냥 있는거 간단한거 달라고, 그랬더니 그제서야 음식을 에어 프라이기에 넣는다. 난 그거 본 순간 열이 확 올랐다. 아니, 샤워하고 나오면 당연히 먹을건데 그걸 이제사 저기에 넣는다고?

나는 저거 빼서 전자렌지에 돌리라고, 아니 그거 그냥 뎁히기만 하는 거면 그냥 달라고, 말하는데 언성이 저절로 높아졌다. 내가 욕실에 다녀왔는데 왜 이제야 뎁히냐고, 눈치가 없다는 말이 쏟아져서 온 집안에 퍼졌다. 그 사람은 내가 평소보다 샤워를 너무 일찍 마치고 나왔다고, 그러면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난 식은 음식을 먹으며 생각했다. 물론 내가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밑에 오래 서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배부르고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거지, 배고픈데 샤워 오래하게 생겼냐고. 식은 음식에 더 처량해졌다. 저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왠지 그동안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자신만 생각하고 주변에 관심이 적었던 것 같다. 본인은 모르겠지. 눈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넌 나에게 관심이 없어' 하고 한마디 날리고 싶은데 이런 상황을 연출할 연기력이 나에겐 없다. 처량하고 슬픈 마음으로 홀로 잠들었다.

늦은 아침,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나지막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애들 앞에서 큰소리 내지 말라고. 뭐지 이건? 내가 어제 저녁에 왜 늦게 들어올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샤워를 빨리 끝내고 나왔는지, 그리고 왜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는건가? '화를 내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해. 애들 앞에서 소리만 지르지 말고' 이런 뜻인가?

토요일 낮 시간이 다 가도록 나의 감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가 밖에서 주로 마당을 정리할 때 나는 티비를 보았으며, 소파에서 낮잠을 잤다. 그렇게 또 하루 해가 저물었다.

저녁을 대충 먹고 느긋히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어제 저녁, 샤워하러 들어가며 저녁밥 있냐고 준비하라고 말로 확인하고 들어갔어야 했다고. 결국 내 잘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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