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은 수용자의 선택에 따라 흐름이 변화하기에 그 양이 선형적 스토리텔링을 채용한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방대하다. 하지만 양과 질은 비례하기 어렵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같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분량이 커진 만큼 세부적인 부분에서 부족해지기 쉽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의 폭을 제한하거나, 어떤 선택을 해도 같은 결과에 수렴하도록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해와 싸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을 제시하되 수용자가 화해를 택해도 상대가 화해를 받아주지 않고 싸움으로 이어지거나 싸움을 택해도 상대가 손을 먼저 내미는 방식으로, 아주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는 있지만 단지 사용자의 성향에 따른 선택을 제공할 뿐 큰 흐름은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수용자가 컨텐츠를 즐기는 도중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결말을 보고 나서 다른 선택의 결과가 궁금해서 다시 한번 더 컨텐츠를 즐기려고 할 때 단점이 된다. 자신의 선택들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수용자는 그 컨텐츠를 반복해서 즐길 이유를 찾지 못 한다. 이 외에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 대해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겠지만,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
평소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았고 예전에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었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을 차용했다. 1980년대 미국의 프로그래머 스태펀 버틀러가 제롬 F. 데이비스의 인터랙티브 소설 밴더스내치에서 영감을 받아 동명의 게임을 만드는 이야기다. 유명 게임회사인 터커 소프트에서 크리스마스에 게임을 출시할 좋은 기회를 얻은 스태펀의 이야기는 방금 언급한 두 작품과는 다르다.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서 선택의 폭을 넓히면서 동시에 디테일을 꼼꼼하게 설계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같은 시간을 투자하면 선형적 스토리텔링이 훨씬 세밀하고 뛰어난 내러티브를 보일 것이다. 스태펀에게도 같은 딜레마가 찾아온다. 크리스마스에 출시하기 위해서 스태펀은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는데, 그럼에도 계속해서 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으며 스태펀의 정신은 무너진다. 그 와중에 존경하던 게임 제작자 콜린과의 대화 등을 통해 스태펀은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누구에게도 없다며 모든 선택의 결과가 하나로 수렴되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컨텐츠들이 양과 질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을 스태펀도 마찬가지로 택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의 약점을 또 다른 방법으로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작업에만 몰두하는 스태펀의 삶에 수용자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많은 선택들은 선택과는 무관하게 결과가 결정된다.
기존에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방식을 채용한 컨텐츠들은 비록 당장의 흐름만 조금 변할 뿐이고 결과에는 큰 영향을 못 주더라도 수용자들에게 선택에서 오는 만족감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일시적인 만족감이라고 하더라도 컨텐츠를 즐기는 도중에는 알아차릴 수 없도록,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갈 뿐이지만 흐름이 변했다고 느끼도록 다양한 장치들을 둔다. 하지만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는 흐름의 변화를 기대하는 수용자들을 비웃듯 최초의 선택부터 의미 없는 선택이다. 처음으로 의미 있는 선택도 진정 의미 있는 선택이 아니라 옳은 답, 그른 답으로 분류해야 할 선택이다. 최초로 흐름에 변화를 가져오는 선택은 터커 소프트의 사장이 인력을 제공할테니 회사에서 같이 제작하자는 말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인데, 만약 그러겠다고 한다면 형편 없는 게임에 대한 평론가의 혹평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그 선택을 한 수용자들은 다시 돌아가 혼자서 제작하겠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선택이 아니라 정답과 오답이다.
처음에는 불만이 있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방대한 선택지들과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의 빈약한 선택지들을 비교할 수 밖에 없었다.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서는 디테일이 부족해지고 어느정도 정해진 결말에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고는 했지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그 문제도 많이 극복한 상태였다. 세부적인 에피소드들의 흐름의 변화가 결말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큰 줄기로만 보아도 몇가지의 결말이 존재했으며 각각의 결말은 수용자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고, 지엽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반복적으로 즐길 가치가 있었고, 각각의 흐름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는 그렇지 않았다. 한정된 선택, 그리고 정답과 오답만이 있었다. 틀린 선택은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보다 다시 돌아가서 바른 선택을 해서 진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할 뿐이었다.
결말을 보고 난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한정된 선택, 정해진 운명이 작품의 주제였다. 운명이라는 태엽장치는 이미 만들어진 과거의 톱니바퀴들에 맞물려서 움직인다. 현재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만들어진 태엽장치에 맞는 톱니바퀴만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선택은 과거의 선택의 연장선에 있고 때로는 이미 만들어진 태엽장치에 어울리는 톱니바퀴가 하나 밖에 없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하는듯 착각하지만 결국은 정해진 운명을 따라갈 뿐이라는 주제를 이 작품에서는 스태펀이 만들어가는 게임을 통해, 스태펀을 통해, 그리고 스태펀의 삶에 개입하는 우리들을 통해 드러낸다. 스태펀의 운명은 수용자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스태펀이 인형을 갖고 놀던 어린 아이일 때 결정되었고, 그보다 이전에 그 인형을 어머니가 선물했을 때, 혹은 또 다른 과거에 의해 결정되었다.
새해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8일이네요. 늦지 않으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평안한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축약본 같은 게임/드라마였어요.
인간은 뭐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정변수 때문에 그 길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부모,
인종,
국가,
유전자,
성장환경,
친인척,
재능,
성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들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어요.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것은
"고정변수"에 얽매이지 않고 나아가려는 발버둥, 외침 같은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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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평소에도 결정론을 어느정도 지지하는 만큼 재밌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던 작품이었어요. 저는 자유의지가 완전히 없다고 믿지는 않지만 글에서 쓴 것처럼 이미 만들어진 태엽장치에 이어나갈 부속 톱니바퀴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만 있다고 생각해요. 크기도, 톱니의 간격도 어느정도 정해진 상태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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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와닿는 비유네요. 톱니바퀴라...
톱니 기어비를 선택해서 삶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부품을 창조해서 끼워맞출 수도 있는 거군요.
아니면 태엽장치 전체를 파멸시킬 엉망진창 부품을 밀어넣는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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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를 결제 하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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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에서는 이를 업종자(習氣)라고 표현하지요. 조건이란 것이 결정되어 있다기 보다는 개연성이 높은 것이지요. 그 개연성이란 것이 마음먹기 따라서 극복할수 있다고하지만 습관의 힘은 패턴과 같아서 블랙홀처럼 강하게 끌어 당기죠. 아무리 양자물리학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세계는 뉴턴 물리학이 더 실재적인 것과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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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군요. 의미 없는 선택이란 게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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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허무할 거 같고, 내 선택에 따라 결과가 너무 많이 달라진다면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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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택을해도 정해진 운명이라는 -
저도 새해쯤에 블랙미러 밴더스네치를 보았습니다
마지막 결과가 상당히 싱겁다?고 느꼈어요
kmlee님의 감상평을 읽으니 또 새롭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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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결말만 놓고 보았을 때는 임팩트가 부족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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