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 영천전투’에서는 화산지역의 전술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신녕에서 북쪽으로 5km 지점, 매봉(DG 8706)-방가산 산줄기 남단에서, 갑령-당지동 접재골(DQ 857955) 간 8 km에 달하는 횡격실을 이룬 화산(주봉 : 828)은 우리나라 지형 특징의 하나인 북저남고 현상이 두드러진 고지로서 신령 일대를 방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지형이며, 6.25 이전에는 조림산, 팔공산, 보현산과 더불어 무장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여 온 험준한 산악지대이다.(p. 131)
(“북저남고”라는 기술은 북고남저의 오기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제7연대 1대대가 신령에 도착한 시간을 8월 29일 오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제1대대가 도착했을 때 이따금씩 적의 박격포탄이 사단 전술지휘소 부근에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대용은 자신이 야전병원에서 부대로 복귀한 것이 8월 26일이며 이때 이미 사단지휘소에 박격포탄이 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27일날 바로 화산으로 출발했으며 화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약 이틀이 걸렸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신령 영천전투(1984)’는 8월 30일 용암산을 탈취했다고 하고 있다. 생전에 이대용 장군은 제3중대가 선두에서 용암산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으며 그 와중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틀동안 제3중대를 선두에 내세운 것은 김용배 대대장의 판단인 듯 하다. 아마도 화산에 올라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 위해서 다른 중대의 전투력을 보존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김용배 대대장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전투를 할 것인가하는 분명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령 영천전투(1984)’와 이대용 장군의 기록은 화산점령과 관련한 부분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이대용 장군은 화산까지는 제3중대가 선두를 섰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이후 화산의 북쪽 고지를 공격할 때 제1중대가 앞으로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중대는 화산지역의 오른쪽 5km 지역으로 보내 대대의 측방을 보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산의 828 고지에 올라서서 북쪽에 있는 고지를 향해 진출하는 과정에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신령 영천전투(1984)’는 828 고지를 올라가기 위한 7부능선에서 저지를 당해 총격전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이대용 장군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고 작성한 전투기록을 추가로 교차확인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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