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9 이유

in stimcity •  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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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유





폰페라다에서부터 연 나흘 동안 줄곧 혼자 걸었다. 혼자 걸으려고 의도한 건 아니다. 순례길 중간을 훌쩍 건너뛰었기 때문일까.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의 태도는 초반에 만났던 순례자들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들은 다른 순례자들에게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 말고는 특별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 역시 다른 순례자들과 괜히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각자 떨쳐 내야 할 것과 풀어야 할 것들에 온전히 집중 하고 있는 단계로 보였다. 저녁때 알베르게에 모여도 사람들은 초반 순례길과는 달리 그리 수다스럽지 않았다. 그저 어디에서 왔냐, 내일은 어디까지 걸을 거냐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모두들 그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순례를 시작한 이라면 여정의 삼분의 이에 다다르는 이즈음에 말수가 적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안드레스도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진입하는 무렵부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지도 몰라요. 그때부터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죠.”



과연 그의 말 대로였다. 실개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전원 마을 비야프랑카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일이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숙소 바깥에 담배를 피우려고 나왔는데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어두운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은하수였다. 서양인들은 젖이 흐르는 것 같다 하여 milky way라고 부르는 그것. 마치 크리스마스 시즌 어느 거리를 온통 장식한 빛들의 향연을 보는 것 같았다. 은하수를 제대로 본 건 초등학교 때 전남 담양의 외갓집에 간 이후로 40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황홀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쑥 의아해졌다.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기에 왔던가. 내가 여기에 왜 왔던 거지? 무슨 이유로?



다음날 비야프랑크를 떠나 까스티야와 갈리시아의 경계를 향해 걸을 때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그건 거창한 존재론적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무슨 이유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자 했던가. 어떤 동기로? 누가 권유라도 했던가? 애초에 여기 오기로 결심하게 된 과정이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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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ㅎㅎ 답이 없어 보입니다. 기억을 잊었으니 성공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