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 땅에다 심어도 억세게 잘 자라나는 미나리. 우리도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땅에서 사는 게 불행해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떠난 미국은 부부에게 기회의 땅이자 청사진이었다. 비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땅은 메마른 땅이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깎아먹거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한다. 생존은 여기나 거기나 녹록하지 않다. 병아리 똥꾸멍만 하루종일 들여다보며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이민 10년 차 부부와 두 아이가 아칸소 벌판의 콘테이너집으로 이사 가는 걸로 영화는 시작한다. 엄마 '모니카'는 처음부터 콘테이너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해서 살 법한 집다운 집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아들 데이빗이 심장병을 앓고 있기에 병원과 동 떨어진 위치도 못마땅했던 것. 더 이상 갑갑한 공장에 갇혀 병아리 똥꾸멍을 보고 싶지 않은 아빠, 제이콥은 50에이커의 땅에 한국 채소를 심기로 한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땅, 사람이 죽어나간 땅 같은 꺼림직함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열망 뿐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그걸 증명하고 싶다.
아칸소는 외지디 외진 곳이다. 한인들도 별로 없거니와 모니카과 같이 일하는 병아리 공장의 다른 한국 여자의 말을 빌리자면 각자 사연을 가지고 '한인 사회'에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일을 하는 부부 대신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오지 시골에 그런 사람을 부를 수 있을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미국에 오기로 한다. 할머니...미나리는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가고 이민자 부부간의 갈등이나 아이들와 할머니의 갈등이 예상 범위에서 오가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바로 이 할머니이다. 영화 소개에는 순자라고 적혀있지만 아무도 할머니를 순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할머니는 할머니 일 뿐이다. 우리가 할머니에게 기대하는 건 뭔가, 늘 온화하고 자상하고 무슨 말이든 웃으면서 들어주고, 묵묵하게 일하고, 뒤에서 든든한 벽이 되어주는 뭐 이런 게 우리가 생각하는 할머니상이 아닌가? 그 이야기는 데이빗의 입으로도 고스란히 나온다.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아."
순자는 온화하고 인자한 할머니상과는 거리가 멀다. 격투기에 빠져있고 오줌 싼 데이빗을 놀리고 헌금한 돈을 훔치고, 심장이 아픈 데이빗에게 달려보라고 무모하게 종용하기도 하고 쿠키도 못 굽는다. 그래서 좋았다. 할머니 같지 않아서. 할머니란 호칭에 가려지지 않아서, 할머니가 할머니같지 않아 싫었던 데이빗은 마운틴듀라고 속이고 오줌을 주면서 둘의 갈등은 심화되지만 서서히 둘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미나리는 이렇게 잡초처럼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막 뽑아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다양한 방식으로 먹을 수 있고 약으로도 쓸 수 있는 미나리는 바람이 불면 고맙다고 절까지 하는 겸손한 풀이기도 하다. 타국에서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는 결국 이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 이란다,'
노래를 함께 하는 순자와 데이빗의 모습이 아름다워 이들 앞에는 행복이 곧 펼쳐질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제이콥의 농사는 번번히 기로에 부딪힌다. 물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거래처의 일방적인 거래를 취소가 이어지기도 한다. 엎친 데 겹쳐 순자는 뇌졸증이 와서 거동도 잘 하지 못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니카는 자신의 엄마와 아들을 위해 도시로 떠나려고 하면서 제이콥에서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제이콥에게는 아직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농장 일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따로 떨어져 살 것을 결정한 가족은 데이빗의 심장 검사를 같이 받으러 오고 기적적으로 데이빗의 건강은 호전된 사실을 알게 된다, 샘플로 가져온 채소들로 한인 슈퍼의 납품 역시 결정되어 이들 가족에게 남은 건 정말 희망 뿐일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이는 것보다 더 무서워."
뱀에게 돌을 던지려던 데이빗을 말리며 했던 순자의 말 처럼 보이지 않게 안으로 쌓여만 갔던 갈등으로 결국 모니카는 제이콥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가족이 병원에 가서 혼자 집을 지키던 순자는 아픈 몸으로 쓰레기를 태우다 불이 나 납품을 할 채소 전부 불에 타버리고 만다. 망연자실한 순자는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려는 듯 무작정 집과 반대 방향으로 넋을 잃은 채 걷고 데이빗과 그 누나는 할머니를 쫓는다. 심장병 때문에 뛰지 못했던 데이빗이 뛰면서'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랑 같이 집으로 가요.' 하고 할머니가 가는 길을 막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울컥났다. 미나리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어디서든 삶을 지속한다. 헤어질 뻔 했던 가족은 오히려 역경을 비료 삼아 함께 삶을 헤쳐나가는 걸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독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컸다. 포기하지 않고 뿌리를 내린다면 언젠가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미나리처럼 미국 땅에 그들은 자리를 잡을 것이다. 삶이 계속되고, 그들이 함께 하는 한. 잔잔하지만 한 번도 지루하다 생각하지 않았고 너무 과한 감동을 뒤어짜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지 않아 좋았어요.
전 미나리가 꿈에 대한 영화로 읽히더라고요. 다양한 사람에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다른 인물에 이입하게 하는 영화를 좋아해요.
그래서 끝나고 나서는 좋지만 또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곱씹을수록 참 좋은 영화더라고요 :D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맞아요. 막 와 너무너무 좋았어!!는 아닌데 곱씹을 수록 먹먹하고 좋더라고요. 감동 위주일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담백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