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에 온 진짜 이유는 쥘 베른이 아니라 '양돌'이었다. 낭트에는 라다크 파시미나 브랜드 '양돌YANGDOL'의 쇼룸이 있다. 아니, 있었다. 라다크의 두 자매가 파시미나 브랜드를 만들고 레 시내에 샵을 냈는데, 그 브랜드가 프랑스 낭트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초모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양돌이 어떻게 프랑스에 진출하게 되었는지, 왜 파리가 아니라 낭트였는지 너무 알고 싶어서 파리에 온 김에 낭트 일정을 추가했다. 그러니까 오로지 양돌의 쇼룸을 방문하기 위해서 낭트에 온 셈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양돌의 쇼룸이 있어야 할 장소에 파시미나가 아닌 갤러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을 더 확인해도 홈페이지와 구글 맵에 적힌 주소는 틀림없이 내가 선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쇼룸을 이전했나 싶어 갤러리 주인에게 물어보니 '양돌 피니쉬'라고 한다. 아… 양돌… 피니쉬라니...!
파시미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년의 네팔 카트만두. 나와 젠젠 그리고 란이 눈 덮인 히말라야를 꼬박 열 시간 동안 걸어서 티베트와 네팔의 국경을 넘고 막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리의 몰골은 조난 당했다가 방금 구조된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고, 여행길에는 죄다 입다 버릴 옷들만 가져와서 '멋'을 부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눈물겨웠던 히말라야 원정(?)을 자축하며 가진 옷 중에 가장 멀끔한 것을 꺼내 입고 야심 차게 터멜 거리를 걷다가, "헬로, 마이 프렌드! 파시미나? 파시미나?" 하며 우리를 유혹하는 상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파시미나 숄'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가게 주인은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다른 색상과 디자인의 숄을 꺼내어 펼쳐 보였고, 어느덧 펼쳐진 숄이 무덤을 이루어 수북하게 쌓였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색감과 정신이 혼미해지는 페이즐리 패턴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무엇이든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 좋다. 베이직, 플레인, 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대체로 다 그렇다. 그런 내게 터멜 거리에서 발견한 파시미나 숄은 인생에 두 번은 없을 과감한 시도였다. 원치 않는 트래킹에 대한 보상 심리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절대로 '멋'을 위해 그 숄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소라색과 크림색 바탕에 화려한 자수가 빼곡히 놓인 파시미나 숄을 두 장 골랐다. 소라색은 여행 중에 몇 번 내가 둘렀고, 크림색은 한국에 돌아가 엄마에게 선물했지만, 엄마는 크림색 파시미나를 단 한 번도 두르지 않았다.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장의 파시미나 숄은 옷장에 수년간 처박혀 있다가 버려졌다. 충동구매에는 란도 동참했는데 란의 어머니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이셨다고 들었다. 아무튼 카트만두에서 샀던 그 머플러는 파시미나가 아니었다. 캐시미어도, 실크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행 다니면서 파시미나라고 팔고 있는 것들을 곳곳에서 숱하게 보았지만, 첫 경험의 실패로 파시미나에 대한 호감이나 기대는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5년 뒤, 라다크에서 다시 파시미나를 들여다볼 일이 생겼다. 친하게 지내던 카슈미르 친구가 운영하는 상점에 한국 친구들을 데리고 갔는데, 부모님 선물을 고르던 친구에게 카슈미르 친구가 서랍장 구석에서 '파시미나 숄'을 '비밀스럽게' 꺼내어 보여준 것이다. "레에서 파시미나라고 팔고 있는 것 중 90%는 가짜라고 생각하면 돼." 카슈미르 친구가 속삭였다. 그가 꺼내어 보여준 숄은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짙은 베이지색의 숄이었다. 윤기 덕분에 금색처럼 보였다. 무척 얇고, 가볍고, 보드라웠다. 카슈미르 친구는 지름이 십 원짜리 동전만 한 링을 꺼내더니 머플러의 한 귀퉁이를 잡아 링을 통과시켰다. 아, 이게 파시미나구나. 우리는 그 보드라운 천을 한참이나 뺨에 비비며 감탄했고, 친구는 무엇에 홀렸는지 파시미나 숄을 서너 장 샀다. 꽤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파시미나가 뭐냐. 우리가 잘 아는 캐시미어 중에서도 고오급 캐시미어가 바로 파시미나다. 캐시미어는 고산에 사는 염소가 겨울을 준비하며 만들어내는 솜털로 지은 직물로 염소들이 겨울옷을 벗고 봄옷으로 갈아입는 시즌에 빗질을 통해서 원모를 얻어내는데, 더 춥고 더 혹독한 환경에 사는 히말라야 염소의 더 가늘고 고운 털로 지은 최고급 캐시미어를 가리켜 파시미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파시미나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티베트 영양의 털은 ‘샤투시’라고 불리는데, 티베트 영양이 멸종 위기에 처하면서 생산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 파시미나의 원산지가 바로 라다크 창탕 지역이다. 파시미나는 라다크말로 레나Lena다. 그런데 왜 이 고급 직물이 ‘레나’가 아닌 ‘캐시미어’로 불리게 되었냐면 카슈미르를 통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캐시미어Cashmere라는 말도 북인도의 지명 카쉬미르Kashmir에서 왔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라다크 노마드들은 염소의 털을 카슈미르에 팔아 생활하지만, 염소에게서 얻어낸 원모를 더 부드럽고 윤기 있게 만드는 가공 기술, 화려한 패턴의 섬세한 직조 및 염색 기술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원모를 가져다가 얇게 더 얇게 실도 잣고, 부드럽게 더 부드럽게 직조도 하고, 패턴도 넣고 염색도 해서 예쁜 숄을 만들어 유럽에 팔았고, 유럽, 특히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 메가 히트를 쳤다. 그렇게 이 직물은 ‘캐시미어’라는 이름으로 최고급 섬유의 대명사가 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라다크는 이 흐름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가공도, 디자인도, 브랜딩도, 유통도 모른다. 최고급 원료를 생산하는 원산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산업 영역에서 오랜 세월 배제되어 왔다. 그들이 얻어낸 원모가 가공에 가공을 거치고, 브랜딩에 유통을 거쳐, 세계 곳곳에서 수십,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상품으로 팔려나가지만, 캐시미어도 파시미나도 라다크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의 원산지가 라다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혹독한 자연환경과 정면 승부하며 염소를 기르고 그들에게서 털을 얻어내는 창탕의 노마드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라다크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라다크 누브라 지역에 가면 지천으로 널린 가시나무가 있는데 라다크 사람들은 그동안 이 나무를 잡초로 취급하여 제거해 왔지만, 이 나무에서 나는 씨벅톤Sea buckthorn이라는 열매가 수퍼푸드로 알려지면서 외지인들이 라다크산 씨벅톤을 앞다투어 채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라다크 사람들은 그들의 산과 들에 뛰노는 염소의 털이, 지천으로 널린 나무에서 자라는 열매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외지인들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고, 최근에 와서야 그 가치를 깨닫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여름 라다크에 가서 보니 카슈미르 상인이 아닌 라다크 사람이 운영하는 매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파시미나 쇼룸이 레 시내에 두세 군데 생겼다. 그들은 카슈미르 파시미나가 아닌 '라다크 파시미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살구 상품 일색이던 기념품 가게에도 크림, 비누 등 다양한 씨벅톤 관련 상품이 제작되어 판매 중이다.
라다크의 파시미나, '레나'는 카슈미르의 ‘캐시미어’와는 완전히 다르다. 레나는 카슈미르의 그것만큼 부드럽거나 가볍지 않다. 화려한 색감도 디자인도 없다. 창탕 고원에 사는 염소 털의 원래 색깔인 오트밀, 베이지, 브라운, 세 가지가 전부다. 파시미나 특유의 윤기도 없다. 링을 통과하는 쇼(?)도 레나에게는 사실 터무니없는 소리다. 나는 레나가 가진 양모 본연의 색감과 질감이 좋다. 그 투박함이 무척 매력적이다. 캐시미어도, 파시미나도 아닌, 레나가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 그래서 창탕의 노마드들이 계속 염소와 함께 살며 레나를 팔아 돈을 왕창 벌고, 창탕 고원에 좋은 학교도 많이 생기고, 그들이 자식 걱정하며 창탕 고원을 떠나 도시로 오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 물론 내 욕심이다. 나는 이런 욕심이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보부상 춘자의 다음 프로젝트로 원산지에서 싸게 사서 한국 가져와서 비싸게 팔아 돈이나 벌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런 위험한 욕심까지 갖게 되었다. 이 위험한 생각을 다듬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지난여름부터 초모 싱게 남매와 함께 조금은 본격적으로 레나 사업을 벌여 보려 작당하고 있다. 공정무역 같은 말은 너무 낭만 꾸러기 같아서 그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고, 다만 다같이 떼돈 벌고 싶다. 초모와 싱게도, 창탕 노마드들도 고생 좀 덜 하고 같이 떼돈 벌면 좋겠다.
양돌에 보낸 문의에 대한 답장은 며칠 뒤 받았다. 낭트 쇼룸은 폐점했으며 현재는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업 비밀 캐오겠다고 초모에게 말해두었는데, 양돌 플랜은 불발로 최종 마무리되었다. 양돌은 낭트에서 사라졌지만, 팀 춘자와 초모가 함께 만들 우리 브랜드의 쇼룸이 빠리에, 릴에, 런던에, 서울에 등장하는 꿈을 꾼다. 이후로는 줄곧 파시미나 생각뿐이다. 초모도 그렇다고 한다. 다음 주에는 다시 라다크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