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분실
파리의 새벽 3시도 사람 사는 동네의 새벽 3시다. 시차 적응 중이라 그런지 와인 한잔에 취해 일찍 잠들었다가 깼는데 담배 한 개비 입에 물러 나간 새벽 거리는 정적에 휩싸여 있다.
한국 같으면 이 시간에 깨면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나올 수 있었겠지만 여기는 24시간 편의점 따위는 없다. 나도 어느새 심야 노동이 일상인 나라의 생활에 익숙해진 게지. 가게들이 문을 열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유럽 생활의 첫날이 영 아득하고 생경하기만 한 것이다. 떠나 오면 여행지의 일상이 이상하게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내가 속해 있던 곳의 일상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삶이 태반을 여행하며 살아온 나로선 한국 사회가 그토록 이상하고 생경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나저나 여행길은 사람을 종종 바보로 만든다. 어제 저녁 공항에서 숙소 오는 길을 찾다가 도중에 윈드스토퍼 상의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생각보다 파리 날씨가 더워 잠깐 벗어들고 다니다 옷을 어디 두고 온 것 같다. 더 바보 같은 건 그걸 새벽에 깬 지금에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 생각이 한켠으로 쏠리면 다른 걸 챙기는 데 소홀해진다. 나는 숙소를 찾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손에 든 재킷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바리바리 싸 올 때 이걸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예상이라도 했을까? 백팩 안에 든 옷가지며 소지품을 꺼내 다시 정리하며 나는 이 여행 중에 또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 헤아려 본다. 내 유럽 생활의 첫날은 내가 바보라는 걸 깨달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잃어버리는 건 꼭 바보짓일까? 어차피 난 여기 무언가를 버리러 왔는데 말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저도 원래 바보짓을 많이 하지만 여행길에서는 더 무력하게 바보가 되곤 해요.
"그런데 잃어버리는 건 꼭 바보짓일까? 어차피 난 여기 무언가를 버리러 왔는데 말이다."
문장에 극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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